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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질의 사랑 - 천선란 소설집
천선란 지음 / 아작 / 2020년 7월
평점 :

오래전 SF의 고전의 시작은 문명의 이기 혹은 문명의 기대에서 출발한 작품들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 SF의 대세는 인간의 이기로 인한 환경오염에 뿌리를 둔 작품들이 부쩍 많아지고 있다.
모래폭풍만 자욱한 사막.
밤하늘의 별이 사라진 대기.
늘어난 질병으로 고통받는 인류.
방독마스크가 필수인 시대.
바다를 잃은 지구.
외계인의 습격으로 쑥대밭이 되어가는 지구.
하나씩 하나씩 소리 없이 사라져가는 생명체.
시뮬레이션을 통해서만 걸어 볼 수 있는 숲길.
그리고 인공 자궁.
그렇기에 출발은 암담하다. 자욱한 미세먼지와 어둠만이 내려앉은 폐허 속에서 갑갑함과 절망 속을 휘돈다. 자본주의의 양면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인류. 바깥에서 안으로 좁혀 들어오는 이 무한의 압력 앞에서 언제까지 절망의 문고리만 잡고 있어야 할까. 그 문을 열면 진짜 사랑과 희망이 있고 그리움에 대한 기다림이 있기는 한 걸까. 하지만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에서 보여준 절망이 은지를 암흑으로 밀어 넣고 다시 절망 앞에 세워 두었다고 결론짓고 싶지 않다. 그 문이 무엇이든 간에.
언젠가 나는 자꾸만 생겨나는 싱크홀을 보며 지구가 한숨을 내쉬는 거라고 말한 적 있다. 자꾸만 땅을 들쑤셔서 고통의 한숨을 내쉬는 거라고. 어슐러 작가의 책을 덮자마자 이 책의 표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난 거실 테이블에 이달에 읽을 책을 미리 꺼내 쌓아둔다) SF의 흐름을 이어가고 싶었다. 이달 북클럽 선정도서이기도 했고. 왠지 정세랑과 김초엽 작가도 떠오를 것 같고.
작가가 자전적 이야기라고 밝힌 <사막에서>는 무미건조한 삶 앞에 던져진 인간들이 보인다. 본다고 믿는 것을 쓰라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말을 좀 더 확장해보면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몸속의 혈류조차도 제 기능을 상실해가는 세상에서 그래도 우리는 흐르고 흘러 각자의 운명대로 살아간다. 아버지로, 어머니로, 딸로. 각자가 짊어진 고독은 각자가 짊어진 고된 견딤과 함께 지구의 먼지 속으로 흩어진다. 그것이 무심함이 되어 부유하더라도 그렇게 부유하다 보면 언젠가 희망의 꼬리를 붙잡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회.
어느 곳이든 네가 나아가는 곳이 길이고, 길은 늘 외롭단다. -p 35
정말 고독한 건 인간일까, 지구일까, 우주일까.
절친의 동생 내외는 일부로 아이를 갖지 않는다. 그렇게 합의를 보고 결혼을 했지만 남편이 늘 일로 바쁘자 아내는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남편은 전혀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며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멀고도 가까운 미래. 아이를 낳지 않는 게 아니라 더는 낳을 수 없는 시대가 온다면 인류는 절박함으로 인해 그 이기심이 잔인하게 돌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를 위해서>는 두 장 분량의 단편임에도 헉!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이야기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반납해야 하는 나.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 여긴 선택권이 없었지.
<레시>는 그 어떤 단편보다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하는. 존재의 가치에 빛을 담아준 이야기였다. 지구는 바다를 잃었고 인류는 바다를 살리기 위해 다른 행성으로 간다. 승혜는 바다 깊이 떠돌던 상실감(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몸의 균형을 차차 잃어간다. 그때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레시의 눈동자. 승혜는 인간만이 지닌 미묘한 감정 하나만으로 그것의 존재 가치가 절대 훼손되지 않길 바란다. 그 바램이 전해졌을까. 아니면 승혜가 그렇게 믿고 싶었을까. 만나서 반가워요. 당신을 기다렸어요. -p.88 그것은 승혜가 영원토록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자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그런 바램의 바이러스가 레시라는 숙주에게 옮겨 간 것처럼.
정세랑의 <지구에서 한아뿐>의 2탄 같았던 <어떤 물질의 사랑>은 기발하고 유쾌한 이야기 속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와 경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너는 민혁이를 사랑해서 이제 남자가 될 거야.
......허 -p.104 이 정도면 엄청난 스포이긴 한데 진짜 잼난다. 어떤 일이든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웃을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더 나은 우리가 되어 내일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구에 같은 인간은 없어요. 모두가 다 서로에게 외계인인 걸, 모두가 같은 사람인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해요. -p.143
사랑. 우주를 가로지르는 사랑 따위에 맘을 둬 본 적이 없는 것 같고 그 사랑이라는 것도 충분히 해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무뎌져가지만 이 그럴 수도 있는 이야기를 읽고 나니 다음 생엔 꼭 우주적 사랑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ㅋ 나와 너와의 온도가 비슷하지 않더라도.^^
타인에게 공감하지 않음으로써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 -p.168 라며 공감 능력을 제거하는 수술을 권한다면 어떨까. 전쟁과 살인의 동기도 정서적 공감의 극대화로 발생했다고까지 설득한다면 혹 하게 될까. <그림자놀이>에서 두 친구는 이십 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지구와 우주)을 떨어져 지낸다. 그리고 한 친구는 이 공감 능력을 제거해 버렸다. 공감 능력이 사라져 버린 친구를 바라보던 친구는 오래전 그 친구를 잃었다고 여긴다. 지구를 떠나 우주를 떠돌다 돌아온 친구는 진짜 지구를 떠났다. 하지만 그 친구를 잃었던이라는 없애버렸던 공감이라는 감정이 어디선가 자꾸 재생되는 느낌을 받는다. 자신의 손이 얹혀 있던 가슴은 그 아픔을 나눠갖기 위해서 계속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필 네가 있던 곳이 우주여서
나는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네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고,
내가 숨 쉬는 모든 곳이
네 아래에 있었다. -p.188
이 말 너무 슬프다.
단편 중 <두하나>는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를 담고 있다. 어느 날 외계 우주선이 떨어졌고 강력한 빛이 일더니 남자만 좀비 비스름하게 변한다. 여자들은 그들로부터 필사적으로 살아남아 지구를 돌려놓으려 한다는 이야기인데 지나의 동생 하나는 외계인의 음성을 분석하는 능력을 지녔으나 어느 날 실종된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지나는 하나를 찾아야 한다는 희망을 놓지 못하는데 마침 두하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를 돌봄으로써 위안을 받고 희망을 품는다. 두 하나 중 두하나가 어떤 역경을 지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역경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지나에게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된다. 이름이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희망까지도 동일화할 수 있다는 건 어쩜 다행스러운 일이다.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는 가장 우울했던 이야기였다. 환경문제가 더 피부로 와닿기도 했고. 물론 나도 약간의 기부와 쓰레기 줄이기 정도의 작은 실천으로 책임감을 덜고 있긴 하지만 읽는 내내 인간이 사라져 버린 저 어두운 구멍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저어새는 밀렵꾼의 눈을 피해 산을 넘지 않고 어둠(터널)을 뚫고 나온다고 한다. 그런 생존능력은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아무튼 멸종되었던 저어새는 기이한 싱크홀 속에서 다시 나왔다. 저어새에게는 분명 보였던 출구가 인간에겐 왜 보이지 않았을까. 그것은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은지가 못 본건 무엇이었을까. 단지 희망찬 미래일까. 아마도 가면 밖의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인간이 저지르는 실수와 사고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 없다. 빈틈이 있어서 인간적이라는 말이 괜한 헛말이 아니다. 교통사고 치사율을 줄이기 위해 로봇을 이용해 테스트를 한다. 그 로봇 이름이 더미다. 더미가 수없이 부딪히고 깨지는 동안 인간의 사망사를 줄여준다. 단지 기계니까, 기계 따윈 부서져도 연민을 가질 필요가 없지만 이 이야기는 한발 좀 더 나아간다. 인간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 때문에 더미에게 심어진 건 배려라는 기능이다. 사랑의 감정을 심어줄 수는 없으니까.
동승자를 살리기 위해 반사적으로 기우는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기 위해 더미에게 친구를 만들어 준다. <마지막 드라이브>는 로봇이지만 인간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로봇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행복하면 인간은 어떻게 되나요?
미래를 걱정하지 않게 되는 것 같아.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래.
그게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네요.. -p. 328
그 행복의 중심에 인간만 존재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인간은 인간을 위해 참으로 많은 것들을 희생시킨다. 반대로 인간을 위해 언제까지 많은 것들이 희생을 감당해야 할까. 로봇이잖아!라고 하기엔 이야기가 던지는 메시지가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