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이 그림 여행 - 화가의 집 아틀리에 미술관 길 위에서 만난 예술의 숨결
엄미정 지음 / 모요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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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한 해가 넘어가는 시점에 내가 넋 놓고 바라본건 타종행사가 아닌 멋진 드론쇼였다. 어마어마한 최첨단 장비들이 선보이는 불빛 쇼. 밤하늘을 수놓은 불빛은 마치 고흐의 <론 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를 떠올리기도 했다. 빛의 향연이 만들어낸 기분좋은 설레임을 끌어안고 새해 첫날 밤을 보냈다.

 

책덕후라면 누구나 새해 첫 책을 고르는데 신중할 것이다. 며칠만 지나도 그런 의미따윈 무색해지고 늘 하던대로 살아가겠지만 '첫'이라는 한 음절이 주는 의미가 워낙에 특별해서 침대맡에 쌓아둔 책을 뒤적였다. 어젯밤의 설레임을 이어 줄 책을 고르다 그림 여행이라면 더할나위없는 선택이 될 것 같았다.

 

그나저나 누군가의 발자취만 몇권째인지... 웃음이 나지만 지금은 더욱이 그럴 수 밖에 없지 않나. 새해 아침 커피한잔 내려놓고 유럽 곳곳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따랐다. 저자는 이 책을 오래전에 준비했다. 한 예술가의 행보를 성실히 따르며 내 놓은 결실에 훗날 나의 발자취도 더해볼 수 있을까 기대해본다.

 

뒤러로 시작해 마티스로 끝맺고 있는 여행길은(그러고 보니 며칠전 마티스 특별전 알람이 떴었는데 잊고 있었네) 그림보다 인물들의 발자취에 더 초점을 두었다. 1부까지 읽고보니 확실히 작가의 생애에 좀 더 치중했음이 보인다. 여러 그림 에세이를 읽어도 매번 기억의 절반은 휘발되 버리기에 이렇게 한 작가에게 여러면의 지면을 할애한 점이 고마웠다. 그들의 생가, 작업실, 가족, 그들이 지나온 길을 지나니 자연스레 그림과 사연이 하나가 되어 다가온다. 한 예술가를 향한 시선은 어떤 순간, 어떤 공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 다를 수 밖에 없고 작가의 일생을 놓고도 감정의 농도가 다 다르기에 매번 같은 작가의 이야기를 읽어도 새롭게 다가온다. 내가 알고 있던 페르메이르의 델프트의 풍경속 '노란벽의 작은 자락'은 어느 곳을 의미할까. 이렇듯 예술작품과 문학(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 만나면 그 의미가 더 심오해진다.

 

평소 그냥 괜찮네라고 여긴 작품이지만 저자의 찬사가 자꾸만 붙게되면 정말 그렇게 보일때가 있다. 그것은 저자만의 감수성과 작품의 이야기가 더해진탓도 있지만 그렇게 이해하고 들여다보면 정말 더 좋아지는 그림들도 있다. 클림프의 <키스>를 바라보면서 여태껏 흐드러지게 핀 꽃밭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나도 실제로 그 그림을 앞에 선다면 아마 꽃밭에 시선을 못박고 있었을런지도.

 

반면 극찬을 듣고도 그 감흥을 덜 느끼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을텐데 저자는 <성삼위일체> 앞에서 그런 경험을 한다. 허나 이는 여행 후 미술관련 서적을 보다 그 이유를 알게 되는데 그림속 3차원 공간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이상적인 눈높이가 175cm라니. 음. 그렇다면 받침대 정도는 작은 이들을 위한 배려차원에서 준비해두면 안되는 것인가? ㅋ

 

저자는 여성화가를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잠시 쉴 수 밖에 없는 지경이 된다. 대체 얼마를 걸었기에 발이 퉁퉁 부은걸까. 팍팍한 일정과 정해진 시간은 이처럼 타국에서 온 관람객들의 심신을 분주하고 고달프게도 하지만 시선이 닿는 곳곳에서 전해지는 예술의 혼때문에 힘든줄도 모르고 또 걷게 되는게 아닐까. 저자가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여성화가 앙귀솔라. 난 그녀의 이름도, 그림도 처음 접했지만 왜 그토록 저자가 보고 싶어 했는지 알것만 같았다. 강렬하고 역동적인 카라바조, 신비스럽고 웅장한 엘 그레코 두 거장은 그림만큼이나 삶의 폭이 넓고 자유로웠다.

 

3부 프랑스편에서는 봐도 봐도 좋을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모네의 정원을 찾아가고 고흐의 그림속에 등장하는 노란집이 있던 자리와 카페를 둘러보기도 한다. 글로만 보던 예술가 세잔은 그곳에서 다시 보게 되는데 세잔의 정물화에서 놓친 시간성을 알게되자 나조차도 세잔이 다시 보인다. 얼마전에 살까말까 고민하던 패터 한트케의 책을 들여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여행은 아무리 잘 계획을 해도 수많은 변수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박물관이 공사중이라든가 날씨가 좋지 못하는건 부지기수다.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방문이 어려운곳도 있고 차편 실수로 제때 도착하지 못하기도 한다. 마치 내 모습인것마냥 안타깝지만 그것마저도 내겐 여행의 묘미로 다가온다. 새해 첫날 선택한 여행에 기분이 들뜬다. 그곳이 아니라서 어떤 일치의 순간이나 저릿한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작가의 생을 알고나자 강렬한 끌림은 더해졌다. 작년에 갈 수 없었던 미술관 방문 계획을 다시 짜보련다. 앙리 마티스전 알림이 다시 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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