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투
헬렌 던모어 지음, 윤미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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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전쟁은 끝났다. 승리국이든 패배국이든 망가진건 똑같고 사람들은 엉망이된 삶을 회복하려 애쓰고 있다. 죽은 이들을 대신 할 이들을 더 많이 낳아야 했고 전쟁을 위해 세웠던 모든 것들을 갈아 엎고 다시 씨를 뿌려야 했다. 폭격의 여파로 갈라진 금은 메워졌지만 그럼에도 티가 났다. 상처를 봉합한 자리가 부풀어 오르듯.

 

어쩌면 삶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영혼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 멎어버린 그 어딘가의 시간속에 갇혀 잊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 다닐런지도 모른다. 그때의 그 미소를 간직한 채. 하지만 좀 더 초조하게.

 

"작전수행 보고가 끝나면 곧장 당신에게 갈게.

바이크를 타고 가면 십오 분밖에 안 걸려.

창문을 두드릴게. 잠들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

 

이번 작전만 끝나면 곧장 오겠다던 그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렸고 그와의 약속을 잊지 못하던 여인은 여전히 창문 가까이를 떠나지 못한다.

기다림은 서서히 노여움이 되고 노여움은... 결국 수류탄처럼 폭발하고 마는 삶의 비극을 낳는다. 전쟁의 긴 그림자 속에 갇힌 사람들이 견뎌야 하는 것들은 비단 마음의 상처만은 아닐 것이다. 얼어붙은 고통이 녹아내리기까지 견딜 수 없는 추위가 사계절 내내 그들을 괴롭힌다.

 

이저벨은 이제 막 결혼한 새내기 주부다. 그녀는 프랑스 교사가 되거나 공무원이 될 수도 있었지만 의사의 아내가 되었다. 남편 필립은 아내를 사랑하고 직업정신도 투철하다. 비록 남의 집 셋방살이로 신혼살림을 시작했지만 점차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반면 이저벨은 작고 연약한 고양이 같다. 긍정적인 남편과는 달리 어딘가 불안정하다. 우선은 남편이 발품 팔아 얻은 이 집부터 맘에 들지 않는다. 오래된 냄새, 공용 욕실, 춥고 습한 복도, 위층에 사는 주인집 여자의 발소리. 게다가 마을에 적응하는 일도 크나큰 숙제다. 그녀에게 보통의 주부로 사는 일(장 보기, 바느질 모임 참여하기, 티타임 갖기 등)은 넘어야 할 인생의 허들이다.

 

겨울이 일찍 시작되자 추위를 견디는 일이 더 곤혹스럽다. 전쟁이 끝난 뒤라 모든 물자는 부족했다. 미트파이도, 돼지고기도, 석탄도, 담요 한 장 더 마련하기도 팍팍한 현실이다. 추위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에 이르자 언뜻 벽장 안에서 보았던 낡은 옷이 떠오른다. 남편의 의학 서적까지 동원해서 겨우 끄집어 낸 것은 낡은 군용 외투였다. 먼지를 털어내고 그녀의 작은 몸을 넣어 본다. 외투는 당장 이불 대용으로 써도 될 만큼 넉넉했다. 그녀는 오래간만에 푹 잠이 든다.

 

그런데 그날부터 누군가 그녀를 찾아온다. 창문을 두드리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한 남자.

그리고 그녀의 기억 속에서 재생되는 누군가의 과거.

 

이상하게도 이저벨은 은근히 이 외투에 집착한다. 꼭 따뜻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알렉의 존재를 궁금해한다.

확실히 그는 전시 중이다.

나는 이 묘하게 흘러가는 상황 때문에 과거인지 꿈인지 모를 혼동이 오기 시작한다. 이저벨이 환영을 보았거나 빙의가 된 건가라는 착각이 들긴 하지만 분명한 건 이 모든 환영은 외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가끔 집 밖을 나서면 폐허가 된 비행장을 둘러보곤 했다. 그 모습이 낯설지가 않은 건 전쟁 중에 보낸 어린 시절 때문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도 전쟁이 내지르는 광포한 소음으로 가득했다. 비행기의 소음과 공군들로 북적이는 마을. 그랬기에 그녀는 과거 속 사연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알렉의 그녀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죽으러 가기는 정말 싫은데

진짜로 그러긴 싫어

죽으러 가기는 정말 싫은데

어차피 뒈질 테....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행운에 의지했을까.

책의 프롤로그를 몇 번이고 읽었다. 알렉과 지미와 두기, 레스, 시드, 레이니, 로드.

침묵 속에 드리워진 긴장감이 비행장의 푸른 불빛들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 그들이 믿는 건 오로지 행운뿐이었을 것이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앗아갔고

수많은 사람들을 삶을 망쳐놨고

수많은 사람들의 현재를 과거 속에 붙잡아 두었다.

이저벨 또한 그랬다. 알렉과의 만남으로 그녀는 그녀를 그토록 추위에 떨게 했던 과거의 문을 닫는다.

"이리 와. 어서, 이지.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

시간이 멎어 버린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우리의 일상을 그런 무모한 전쟁에 빼앗겨서는 안 된다. 다시는.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작가의 섬세한 문체가 돋보인다. 작가의 책을 더 만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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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란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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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란>은 새 옷을 입고 조금 다듬어져 재출간 된 책이다. 표지 그림은 단편 <불두화>를 그린 것이고 표제작 <토란>은 이 책의 첫 번째 단편이다. 보통 표제작 -내가 본-은 중간 아니면 거의 끝나갈 즈음 등장하기 마련인데 <토란>이 제일 먼저 등장한다. 열 편의 단편 중에서 단연 <토란>이 압도적이긴 했다. 부엌에서 한바탕 벌어지는 요리의 소음과 그녀의 구수한 사투리에 들러붙은 한恨. 거기에 거실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까지 더해져 묘한 합주를 이룬다. 그 소음들 사이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신경전. 라디오 구성작가였고 요리 좀 한다고 알려진 작가여서인지 세밀한 직관과 어우러진 능숙한 말놀림이 돋보인다. '아. 이런 관찰력을 지녀야 이런 글이 나올 수 있구나'를 틈틈이 되새겨가며 읽었다.

 

마지막 단편을 제하고 아홉 편의 단편들은 여성의 삶을 이야기한다.

<토란>과 <도마령>에서 비치는 오래전 엄마들의 삶은 무능한 남편 때문에 더욱 억척스럽다. 그녀(아내)들은 시집살이의 설움보다 그(남편)에 대한 원망과 분이 끓어넘친다. <토란>속 그녀는 싹수없는 그의 비화를 들춰내어 헐뜯고 또 뜯는다. 그럼에도 분을 삭이지 못하고 결국 밥상을 엎어버린다. 그녀는 그렇게라도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반면 <도마령>속 그녀는 그에 대한 기억을 윤색하고 미화하는 데 평생을 바친 사람-p.228으로 그려진다. 방식은 달라도 그녀는 끝까지 그를 추켜세움으로써 그녀의 존재감을 지켰다. 그녀는 그의 죽음 뒤에 온 연민으로 그녀의 삶을 긍정적으로 끌고 나갔다. 그러면 된 것이다. 그것이 내 삶을 사랑하는 길이었다면.

 

<토란>은 평생 원수지간처럼 살아온 시모와 시부의 화해를 위해 며느리가 조촐한 식탁을 차려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미운 놈은 떡 하나도 더 준다는데 시모는 시부의 입으로 자꾸만 들어가는 새우가 못마땅해 결국 폭발하고 만다. ㅋㅋ

이처럼 절대 살아서 풀어내지 못할 사이도 있다. 가려워 견딜 수 없는 토란의 독처럼 그와 그녀는 끝까지 가려운 곳을 긁어 줄 수 없는 사이일 뿐이다. 어찌 되었든 불협화음 끝에 폭발해버린 현장에서 꿈을 잃은 자의 눈빛이 되어 퇴장한 그에게서 사뭇 안쓰러움이 밀려온다.

 

 

 

<마른 날들 사이에>와 <비하리에서,나는>에는 짐승만도 못한 놈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여자들이 등장한다. <마른 날들 사이에>속 여자는 갈보년의 딸이라는 놀림과 청소년기에 맞닥뜨린 짐승만도 못한 관계(엄마와 내연남)로 인해 인생이 까슬까슬하게 메말라버렸다. 여자는 마시고 마셔도 늘 갈증에 시달린다. 마치 의문이 해결되지 않아 목마른 사람처럼. 그랬던 여자는 자신이 운영하던 산장의 투숙객으로 인해 예전부터 떠안고 있던 의문을 풀게 된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모든 이치가 양립된 채로 하나의 존재를 이룬다는 사실을 깨닫자 무책임했던 엄마에 대한 원망을 지워버린다.

 

<비하리에서, 나는>속 짐승은 좀 더 강력하게 여자의 삶을 옥죈다. 탄광촌의 음침하고 우울한 분위기와는 달리 풋풋한 시절을 지나고 있던 나경은 그날도 절친과 함께 더위를 피하기 위해 밤마실을 감행한다. 우중충한 비하리의 삶에 진저리를 친 건 친구 경옥이었건만 떠난 건 나경이었다. 한 여름, 굶주린 욕망을 주제하지 못한 짐승 같은 놈이 나경을 지목했기 때문에. 나경은 비하리를 등지고 떠났음에도 비하리 밖에서조차 등을 돌리고 결국 비하리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온 날. 그날과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렇지만 이번은 달랐다. 오래전 자신을 옭아매던 과거와 다시 마주한 그녀는 짐승 같은 놈을 물고 놓지 않는다. 마치 그보다 더한 포악한 짐승이 되겠다고 작심한 것처럼. 사는 것처럼 살고 싶다고 나경을 떠난 남편처럼 그녀도 사는 것처럼 살 수 있을까.

 

사랑은 아프다. 어쩌면 사랑도 병이다. 그것이 더더욱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젊은 베르테르도 죽음으로 사랑의 완성하지 않았던가. <불두화>속 서경은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사랑 때문에 죽을 만큼 아팠고 여전히 힘들다. 그가 아니라 그녀였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서로를 안았음에도 세상의 시선을 감당할 수가 없어 관계를 끊어 버린 건 서경이 아닌 그녀가 먼저였다.

그녀는 살 의미를 잃은 사람처럼 무너져 갔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 때문에 한 남자아이가 죽어버렸다. 정작 죽겠다고 삶을 내려놓은 건 자신이었는데 자신을 좋아하던 남자가 죽은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향기가 없는 꽃 불두화를 보며 세상의 덧없음을 떠올린 그녀. 그럼에도 이 <불두화>의 꽃말은 제행무상(우주의 모든 사물은 늘 돌고 변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다.)이다. 살아 있는 한 그녀는 한 모양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파꽃>과 <미노>는 짝사랑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미노>편이 좀 더 냉정해 보인다.

<파꽃>의 첫 문장만으로도 이야기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자기도 모르게 지나간 순간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 내지르게 되는 한마디. 파······ 그는 그저 대전 전파사 작은 총각이라 불리며 정확한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친한 이웃일뿐이었다. 여자의 집안 곳곳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음에도 여자는 주위를 맴돌던 그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세월을 보냈다. 오래전 파꽃도 꽃이냐고 묻던 남자. 여자에게서 들었던 파꽃의 의미를 들으며 스스로를 파꽃 같다고 여겼을 남자의 순정이 안타까워 내 입에서도 그 단어가 절로 나온다. 파······꽃.

 

십오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경마장에서 <미노>를 단박에 알아 본 여자는 어린 시절 미노와의 추억을 상기한다. 어쩔 수 없이 마을을 떠나버린 건 미노네였지만 텅 빈자리에서 솟아난 아픔은 오로지 그녀 몫이었다. 미노를 다시 마주한 여자는 그리움보다 그때의 기억이 불쑥 떠올랐나 보다. 꼭 기다려달라던 미노에게 무슨 심술이 발동한 걸까. 하지 못한 말들만 둥둥 떠있을 것만 같은 그 자리가 몹시 서늘하다.

 

<거미집>을 읽고 있으니 속에서 천 불이 난다. 아들 아들 하지만 정작 늙은 어미를 거두는 건 죄다 딸 몫이다. 늙은 어미와 맏딸 양지뜰댁의 사이는 이제 동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맏딸은 여전히 어미의 아들 사랑이 눈꼴 시리고 양지뜰댁은 시엄니의 눈엔 딸만 둘 낳은 죄인이다. 이놈의 아들 아들 문화는 여자들이 한 술 더 떠서 만든 게 아닐까 싶다. 그놈의 아들 병. 대한민국이 앓고 있는 중병. 두 아들 보고 살겠다던 늙은 어미의 눈치도 이미 빤하다. 결국 자신의 곁을 지킬 사람은 맏딸이라는걸.

 

마지막 단편 <그 재난의 조짐은 손가락에서 시작되었다>는 한편의 우화를 본듯하지만 징한 감동이 있었다. 인간을 위해 실험대에 오르는 비참한 생쥐를 화자로 내세워 생명경시와 인간의 이기를 돌아보게 한다. 실험실에서 탈출해 인간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인간의 파멸을 다짐했건만 한 여자 때문에 희생의 길을 택한다. 그는 인간의 뇌세포를 지닌 슈퍼 생쥐다. 생각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생쥐는 모든 인간이 그렇지 않다는 걸 경험했다. 자의에 의한 희생정신이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인간은 지독스럽게 이기적이지만 모든 인간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토란>부터도 좋았지만 어느 하나 버릴 이야기가 없었다. 그만큼 여성으로부터 뻗어 나온 다양한 관계에 집중하고 되짚어 볼 수 있어 좋았다. 특히 <이 땅의 낯선 자>편에서 여자를 납치한 납치범들의 대화가 정곡을 찔렀다. 여자의 몸값을 계산할 때마다 여자는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남편의 사랑=몸값'이라는 계산에 자존심이 상하기 시작하고 애도 없고 결혼 오 년차에 몸값은 똥값이 될 수도 있다는 논리. 전혀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실소가 터진다. 위기를 모면한 뒤 그녀가 한 행동에는 그닥 공감이 되지 않지만 각자의 욕망이라는 가면 뒤에 감춰진 진실의 얼굴이 이렇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토란>편을 읽다 총각 무와 파전이 훅 당겼다. 그리고 며느리의 생각처럼 총각 무와 파전은 그냥 내놓는 게 맞는다고 본다. 무는 통째로 베어 먹어야 제맛이고 파전 또한 젓가락으로 찢어 먹어야 더 맛나는 법. 먹는 사람의 노고보다 만든 사람의 노고를 더 생각해야 하지 않나. 집 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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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21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분의 언어가 살아 꿈틀거리네요 미리보기 몇장 읽어 봤지만 소름 끼칠정도로 인간의 내면속을 엿보고 있는,, 건빵님 리뷰 읽고 나니 토란탕이 생각나는 1人 ^.^,

건빵과 별사탕 2021-02-21 17:45   좋아요 1 | URL
제가 여태 토란탕이란 음식을 먹어 본적이 없어요.ㅎ
토란이 우째 생겨먹은지도 모르고요.ㅋㅋ
그 맛이 정말 궁금해서 엄마에게 물어보려 합니다.^^

작가님 글 정말 좋았어요.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 - 여성 예술가는 자신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프랜시스 보르젤로 지음, 주은정 옮김 / 아트북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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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회화책을 볼 때면 늘 여성화가의 비중이 적음을 아쉬워했었다. 시대가 그랬으니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만 여겼음에도 모래알 속에서 진주를 찾듯 눈에 띄는 여성작가들의 그림들을 만날 때면 강한 끌림을 받았다. 소포니스바 안귀솔라처럼.

 

이 책은 여성화가들의 작품을 많이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매료되기도 했지만 자화상 위주로 언급이 되어 있다는 점이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자화상은 초상화와는 많이 다르다. 사진을 찍히는 것보다 셀카를 찍으려 할 때 우리는 더 분주해진다. 그만큼 자화상은 곧 자신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화상이 언급될 시기엔 사진의 역할뿐 아니라 그 외 다양한 이유로 제작이 되었다. 누군가를 존경해서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서, 미래의 고객과 여성 화가에 대한 호기심 충족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말이다. 어찌 되었든 여성화가들은 남성 중심의 시대에서 중심으로 뻗어 나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주어진 자신의 재능만큼 현재뿐 아니라 후대에서도 인정받길 원했고 그러한 염원들을 자화상에 고스란히 담고자 했다. 제아무리 남성들의 시선이 제자리걸음이라고 하여도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우아하고 아름답게, 그 순간만큼은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시선을 그림 밖으로 던졌다.

 

 

 

5세기를 지나오는 동안 그녀들이 얼마나 세상의 벽을 허물기 위해 나름의 애를 써왔는지가 보인다. 시대순으로 소개된 180점의 그림들에서 여성화가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해 보게 된다. 여성과 미술가라는 연결점을 짓고 싶어 하지 않았던 관점이 저 아래 깊숙한 곳에서부터 겹겹이 쌓여있긴 했지만 불균형을 무너뜨리기 위한 여성들의 시도는 점차 대담해지고 과감해진다. 한 손엔 붓을 다른 한 손엔 팔레트를 들고 단정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여성들의 몸짓이 점차 역동적이고 창조적으로 바뀌어 갔다. 금기를 깨고 당당하게 선을 뛰어넘은 그녀들의 삶에서 한편의 위인전을 보듯 에너지가 느껴진다.

 

여성의 자화상이 본격화된 건 17세기부터라고 한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여성 예술가들의 열망이 호의적이었다. -p.37그것은 여성에게 점차 배움에 길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여성은 결혼으로 인한 제약도 많았고 제도적 지원을 받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남성들과 평행선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언제나 여성 예술가들은 사적인 위치에 머물러야 했다. 그럼에도 여성은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하나하나 잡아나갔다. 화가가 여성의 직업으로 안착하며 그 수는 점차 증가한다. 여성 아마추어의 작품들이 판매의 제약을 받거나 그림 기법 또한 제약이 따랐으나 여성들은 자기들만의 영역에서 독자적으로 성장해갔다.

 

 

 

 

가장 눈에 두드러졌던 건 여성적이고 아름다움이 주였던 자화상들에서 점차 그 관습이 벗겨져 나갔다는 점이다. 앞치마와 흘러내린 머리카락에서 작업의 열정을, 여성성을 벗어던진 모습에서 분노와 진지함을 표현했다. 20세기부터는 그러한 변화가 더욱 두드러진다. 여성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캔버스에 담아냈다. 여성들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출간되기 이전부터 그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여성들은 자기만의 방의 내면까지도 서슴없이 공개한다. 자신의 삶이나 가치관이 다양한 예술작품을 통해 발현되었고 페미니즘 운동까지 끌어낸다. 1960,70년대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현대 자화상은 점차 복잡하고 난해해져 갔지만 무척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여성의 고정관념을 부수는 것부터 건강까지도 관심주 제로 등장한다.

미술가가 자신의 캔버스가 될 때 가장 극단적인 형식의 자화상이 탄생한다. -p.284

 

여성의 자화상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출발하였든 그녀들의 손에 들려 있던 거울은 그녀의 내면을 비추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억압과 차별로 인해 여성들은 스스로뿐 아니라 주변 환경에 대해 영리하고 창조적이 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작품들을 독자적으로 재해석하고 분석한 책을 만나서 뜻깊은 시간이었다. 앞으로 예술작품 앞에서 좀 더 열린 시각과 깊이 있는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공부해야겠다.

 

p.s) 셀카 한 장을 찍더라도 좀 더 연구하는 자세를 가져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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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20 18: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책 도판도 훌륭하네요. 인상주의 시대때도 여성화가들 꽤 활동 했었는데 남성위주 중심 미술계에서 제대로 전시도 못하고,,아르메테시아의 넘 불행한 일생(아버지 친오빠 남편)때문에 이책 마음 아플것 같아서 못읽어 봤는데 건빵님 리뷰 읽으니 구매 땡스 해야겠어요 ㅋㅋ
 
어떤 물질의 사랑 - 천선란 소설집
천선란 지음 / 아작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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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SF의 고전의 시작은 문명의 이기 혹은 문명의 기대에서 출발한 작품들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 SF의 대세는 인간의 이기로 인한 환경오염에 뿌리를 둔 작품들이 부쩍 많아지고 있다.

 

모래폭풍만 자욱한 사막.

밤하늘의 별이 사라진 대기.

늘어난 질병으로 고통받는 인류.

방독마스크가 필수인 시대.

바다를 잃은 지구.

외계인의 습격으로 쑥대밭이 되어가는 지구.

하나씩 하나씩 소리 없이 사라져가는 생명체.

시뮬레이션을 통해서만 걸어 볼 수 있는 숲길.

그리고 인공 자궁.

 

그렇기에 출발은 암담하다. 자욱한 미세먼지와 어둠만이 내려앉은 폐허 속에서 갑갑함과 절망 속을 휘돈다. 자본주의의 양면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인류. 바깥에서 안으로 좁혀 들어오는 이 무한의 압력 앞에서 언제까지 절망의 문고리만 잡고 있어야 할까. 그 문을 열면 진짜 사랑과 희망이 있고 그리움에 대한 기다림이 있기는 한 걸까. 하지만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에서 보여준 절망이 은지를 암흑으로 밀어 넣고 다시 절망 앞에 세워 두었다고 결론짓고 싶지 않다. 그 문이 무엇이든 간에.

 

언젠가 나는 자꾸만 생겨나는 싱크홀을 보며 지구가 한숨을 내쉬는 거라고 말한 적 있다. 자꾸만 땅을 들쑤셔서 고통의 한숨을 내쉬는 거라고. 어슐러 작가의 책을 덮자마자 이 책의 표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난 거실 테이블에 이달에 읽을 책을 미리 꺼내 쌓아둔다) SF의 흐름을 이어가고 싶었다. 이달 북클럽 선정도서이기도 했고. 왠지 정세랑과 김초엽 작가도 떠오를 것 같고.

 

작가가 자전적 이야기라고 밝힌 <사막에서>는 무미건조한 삶 앞에 던져진 인간들이 보인다. 본다고 믿는 것을 쓰라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말을 좀 더 확장해보면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몸속의 혈류조차도 제 기능을 상실해가는 세상에서 그래도 우리는 흐르고 흘러 각자의 운명대로 살아간다. 아버지로, 어머니로, 딸로. 각자가 짊어진 고독은 각자가 짊어진 고된 견딤과 함께 지구의 먼지 속으로 흩어진다. 그것이 무심함이 되어 부유하더라도 그렇게 부유하다 보면 언젠가 희망의 꼬리를 붙잡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회.

어느 곳이든 네가 나아가는 곳이 길이고, 길은 늘 외롭단다. -p 35

정말 고독한 건 인간일까, 지구일까, 우주일까.

 

절친의 동생 내외는 일부로 아이를 갖지 않는다. 그렇게 합의를 보고 결혼을 했지만 남편이 늘 일로 바쁘자 아내는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남편은 전혀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며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멀고도 가까운 미래. 아이를 낳지 않는 게 아니라 더는 낳을 수 없는 시대가 온다면 인류는 절박함으로 인해 그 이기심이 잔인하게 돌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를 위해서>는 두 장 분량의 단편임에도 헉!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이야기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반납해야 하는 나.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 여긴 선택권이 없었지.

 

<레시>는 그 어떤 단편보다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하는. 존재의 가치에 빛을 담아준 이야기였다. 지구는 바다를 잃었고 인류는 바다를 살리기 위해 다른 행성으로 간다. 승혜는 바다 깊이 떠돌던 상실감(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몸의 균형을 차차 잃어간다. 그때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레시의 눈동자. 승혜는 인간만이 지닌 미묘한 감정 하나만으로 그것의 존재 가치가 절대 훼손되지 않길 바란다. 그 바램이 전해졌을까. 아니면 승혜가 그렇게 믿고 싶었을까. 만나서 반가워요. 당신을 기다렸어요. -p.88 그것은 승혜가 영원토록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자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그런 바램의 바이러스가 레시라는 숙주에게 옮겨 간 것처럼.

 

정세랑의 <지구에서 한아뿐>의 2탄 같았던 <어떤 물질의 사랑>은 기발하고 유쾌한 이야기 속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와 경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너는 민혁이를 사랑해서 이제 남자가 될 거야.

......허 -p.104 이 정도면 엄청난 스포이긴 한데 진짜 잼난다. 어떤 일이든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웃을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더 나은 우리가 되어 내일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구에 같은 인간은 없어요. 모두가 다 서로에게 외계인인 걸, 모두가 같은 사람인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해요. -p.143

사랑. 우주를 가로지르는 사랑 따위에 맘을 둬 본 적이 없는 것 같고 그 사랑이라는 것도 충분히 해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무뎌져가지만 이 그럴 수도 있는 이야기를 읽고 나니 다음 생엔 꼭 우주적 사랑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ㅋ 나와 너와의 온도가 비슷하지 않더라도.^^

 

타인에게 공감하지 않음으로써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 -p.168 라며 공감 능력을 제거하는 수술을 권한다면 어떨까. 전쟁과 살인의 동기도 정서적 공감의 극대화로 발생했다고까지 설득한다면 혹 하게 될까. <그림자놀이>에서 두 친구는 이십 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지구와 우주)을 떨어져 지낸다. 그리고 한 친구는 이 공감 능력을 제거해 버렸다. 공감 능력이 사라져 버린 친구를 바라보던 친구는 오래전 그 친구를 잃었다고 여긴다. 지구를 떠나 우주를 떠돌다 돌아온 친구는 진짜 지구를 떠났다. 하지만 그 친구를 잃었던이라는 없애버렸던 공감이라는 감정이 어디선가 자꾸 재생되는 느낌을 받는다. 자신의 손이 얹혀 있던 가슴은 그 아픔을 나눠갖기 위해서 계속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필 네가 있던 곳이 우주여서

나는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네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고,

내가 숨 쉬는 모든 곳이

네 아래에 있었다. -p.188

이 말 너무 슬프다.

 

단편 중 <두하나>는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를 담고 있다. 어느 날 외계 우주선이 떨어졌고 강력한 빛이 일더니 남자만 좀비 비스름하게 변한다. 여자들은 그들로부터 필사적으로 살아남아 지구를 돌려놓으려 한다는 이야기인데 지나의 동생 하나는 외계인의 음성을 분석하는 능력을 지녔으나 어느 날 실종된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지나는 하나를 찾아야 한다는 희망을 놓지 못하는데 마침 두하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를 돌봄으로써 위안을 받고 희망을 품는다. 두 하나 중 두하나가 어떤 역경을 지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역경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지나에게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된다. 이름이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희망까지도 동일화할 수 있다는 건 어쩜 다행스러운 일이다.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는 가장 우울했던 이야기였다. 환경문제가 더 피부로 와닿기도 했고. 물론 나도 약간의 기부와 쓰레기 줄이기 정도의 작은 실천으로 책임감을 덜고 있긴 하지만 읽는 내내 인간이 사라져 버린 저 어두운 구멍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저어새는 밀렵꾼의 눈을 피해 산을 넘지 않고 어둠(터널)을 뚫고 나온다고 한다. 그런 생존능력은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아무튼 멸종되었던 저어새는 기이한 싱크홀 속에서 다시 나왔다. 저어새에게는 분명 보였던 출구가 인간에겐 왜 보이지 않았을까. 그것은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은지가 못 본건 무엇이었을까. 단지 희망찬 미래일까. 아마도 가면 밖의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인간이 저지르는 실수와 사고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 없다. 빈틈이 있어서 인간적이라는 말이 괜한 헛말이 아니다. 교통사고 치사율을 줄이기 위해 로봇을 이용해 테스트를 한다. 그 로봇 이름이 더미다. 더미가 수없이 부딪히고 깨지는 동안 인간의 사망사를 줄여준다. 단지 기계니까, 기계 따윈 부서져도 연민을 가질 필요가 없지만 이 이야기는 한발 좀 더 나아간다. 인간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 때문에 더미에게 심어진 건 배려라는 기능이다. 사랑의 감정을 심어줄 수는 없으니까.

동승자를 살리기 위해 반사적으로 기우는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기 위해 더미에게 친구를 만들어 준다. <마지막 드라이브>는 로봇이지만 인간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로봇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행복하면 인간은 어떻게 되나요?

미래를 걱정하지 않게 되는 것 같아.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래.

그게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네요.. -p. 328

 

그 행복의 중심에 인간만 존재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인간은 인간을 위해 참으로 많은 것들을 희생시킨다. 반대로 인간을 위해 언제까지 많은 것들이 희생을 감당해야 할까. 로봇이잖아!라고 하기엔 이야기가 던지는 메시지가 슬프다.

 

여태 나는 피상적 슬픔과 연민만 느끼고 지냈던 건 아닐까. 작년부터 SF 소설만 읽고 나면 반성 모드로 돌입하게 되는 건지....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꾼다던 작가. 그래서 난 지구 살리기 프로젝트 작가를 한 명 더 추가하며 인사를 건넨다.

이렇게 알게 돼서 반가워요. 다음 작품을 만나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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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16 15: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작품 기대 되네요 건빵님 리뷰 읽으면서 어떤 영화가 떠올랐는데 독일 무성영화 ㅋㅋ 폭신 폭신 곰돌이 넘귀엽 ʕ-᷅ᴥ-᷄ʔ

건빵과 별사탕 2021-02-16 15:12   좋아요 1 | URL
지인분이 요런 스퇄의 책을 몇권 추천해 주셨는데 생각보다 잼나네요. 숨겨진 메세지도 단단하고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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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를 대표하는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 나름으로 불행하다.-처럼 인간은 각자가 가진 불행의 그릇만큼 불행하다. 나에게 작은 고통이 누군가에겐 전부인 고통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베르테르에겐 사랑( to you)이 전부였고 나도 사랑(myself and)이 전부지만 그 대상이 다를 뿐이다. 베르테르가 자기 자신을 조금만 더 아꼈다면 슬픔을 정당화한 자기학대는 하지 않았을 텐데.

 

작년에 읽고 재독을 했다. 작년에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느낀 감정은 짜증이었다.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도 납득이 안되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인데 그럴 때마다 젊음을 허망하게 끝내서야 되겠는가.

사랑 이야기는 나의 성향이 어느 정도 반영될 수밖에 없다. 난 아무리 봐도 베르테르의 집착으로 밖엔 보이지 않았다. 재독하기 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제목을 한참 머릿속에 띄워놓고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젊은 베르테르 자신의 슬픔(사랑)을 이해하기엔 도저히 감성보다는 이성이 앞서서 연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좌절) 전체를 이해하려고 드니 조금씩 감성의 문이 열렸다.

 

베르테르는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심경을 전한다. 그가 잠시 편지가 뜸했던 6월 초 그는 한 여인의 세상 속으로 빠진다. 약혼자까지 있는 여인이었음에도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해와 달과 별은 제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겠지만 나는 도무지 낮과 밤을 분간할 수가 없었네. 내 주위의 세상이 통째로 사라져버렸던 것일세. -p.42

 

그가 <전쟁과 평화>의 아나톨 같은 성향(바람둥이-약혼자가 있는 나타샤를 완전 홀림)이었다면 가볍게 사랑을 쟁취했을는지도 모르지만 베르테르는 감성은 충만하나 소심한 스타일이었다. 정말 심수봉의 노래 '사랑밖에 난 몰라'를 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남자다.

 

아나톨과 베르테르의 공통점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점점 대담해진다는 것이었다. 아나톨이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면 베르테르는 단언과 확신으로 보여준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베르테르도 한 머슴의 과감한 결단력을 부러워하거나 심지어 미치광이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의 단언과 확신은 그 수위가 점점 높아만 간다.

그녀도 나를 사랑하고 있고 그녀 주변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으며 그녀가 자신과 결혼했으면 더 행복했을 거라는 마음. 2부에 가면 그러한 확신이 더 절정을 보인다. 로테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서 편지의 수신인이 나라는 상상을 하는 것도 모자라 그녀가 기르던 새가 입을 맞추자 그 작은 새의 부리가 그녀의 입술에서 내 입술로라며 행복해한다. 게다가 나중에는 알베르토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단정 짓기까지 한다.

 

이런 점들이 나를 점점 더 짜증 나게 했는데 과연 그의 행동을 사랑에 눈먼 젊은이의 순수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들이 그의 사랑이 불러온 착각일까, 행위의 진실일까 하는 문제도 정리가 되지 않는다. 여전히~~

그가 틀리고 알베르토가 옳다는 건 아니지만 그가 알베르토와 나누는 대화의 절반 이상이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변명 같다.

 

도덕적으로만 본다면 그는 마음을 거두고 그들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물론 본인도 죄책감에 잠시 그들 곁을 떠나 있었지만 바깥에서 겉돌다 로테를 잊지 못하고 다시 오게 된다. 그렇다면 로테는 책임이 없을까. 로테는 베르테르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에게 자꾸 공간을 내어주었다. '내일도 오실 거죠?'라는 기대와 '사랑하는 베르테르'라는 문장으로 우정을 포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정쩡하게 빈틈을 내어주던 그녀조차도 베르테르의 감정이 극에 달하자 알베르토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이 상황에 부담을 느낀다. 이런 종류의 사람이 여러 사람의 감정을 아프게 하는 법이지.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된 이유로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숭배하게 되었는지 모른단 말일세! -p.57라는 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녀와 자신의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끌림이 강력해질수록 자신이 비참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느낀다. 할머니의 자석산 이야기를 떠올린 데는 그런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생동하는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 오래전 그는 그 속에서 느끼는 벅찬 감정에 전율을 일으켰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지금은 인간이 자연에게 행하는 파괴력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만큼 그는 사랑이 충만했을 때 오는 행복감보다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오는 불행에 더 집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초겨울 그의 심경은 절정에 달한다.

아, 과연 나보다 비참한 인간이 나 이전에 존재했을까. -p.137

 

사랑의 끝이 소유가 아님을 깨닫는 것까진 좋았으나 그는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죽음에 두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말았다. 그를 위해 슬퍼하고 후회할 그들을 떠올리면서 위안을 얻다니. 나는 결정적으로 그의 죽음 때문에 그가 로테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보이지 않는다.

오래전 대학교 친구 중에 그 친구 때문에 자살한 남자가 있었다.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친구의 집 아파트 바로 앞 동에서 뛰어내렸다는 얘기를 듣고 경악을 한 적이 있다.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라서 그 친구가 가졌던 트라우마의 크기는 알 수 없지만 오래가지 않았을까. 특히 베르테르가 로테와 처음 만났을 때의 복장 그대로 죽으려 했을 때 소름이 돋았다.

 

로테는 과연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발걸음을 재촉해 보아도 '저곳'이라는 이상(理想)이 '이곳'의 현실이 되어버리는 순간 모든 것은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만다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결핍과 절박함 속에 머물게 되고 우리의 영혼은 사라져버린 활력소를 또다시

갈망하게 되는 게 아닐까. -p.43

 

위 말을 스스로 했음에도 그는 왜 사랑만큼은 대입시키지 못한 걸까. 사랑도 인간의 반복된 갈망에 하나였음을 알았더라면 그가 내세의 믿음에 빠져 버리지 않았을 텐데. 그는 너무나 속단했고 성급했다. 세상과의 불화를 죽음으로 벗어나려 한 것! 그것을 자유라고 여긴 그 사실이! 난 그것이 슬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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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16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르테르가 발표했을 당시에 당시 10대 20대들이 소설속 베르테르처럼 옷을 입고 자살을 할정도로 ㅋㅋ 건빵님 말씀처럼‘사랑의 끝이 소유가 아님‘ 명언임 ^.^

건빵과 별사탕 2021-02-16 10:25   좋아요 1 | URL
진짜 젊은이들의 무분별한 신드롬 문화도 무서운것 같아요. 소름이 돋더라고요.으흐~~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