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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키메라의 땅 1~2 세트 - 전2권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김희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8월
평점 :

*출판사 제공도서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상상력의 작가다.
그의 작품 세계는 개미, 뇌, 죽음, 신과 같은 거대한 주제를 택해, 그 속에 인간 문명과 의식의 한계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과학적 사실과 허구를 엮어내면서도 독자가 "만약 그렇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그는 과학적 상상력과 철학적 호기심을 연결하는 매개자라 볼 수 있다. 그의 소설은 대중적이다. 글쓰기의 간명함과 강한 이야기성이 장점이라 술술 잘 읽힌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개미>를 읽지 못하고 있다. 조만간 책장에서 꺼내야겠다.
이번 소설에 등장하는 혼종 캐릭터는 가끔 히어로물이나 SF물에서 접해서인지 새롭고 신선하다는 느낌은 덜했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글답게 인류애적 물음이 한가득이라서 좋았다. 즉 이 소설은 단순한 공상과학이 아니라, 우리가 직면한 현실의 그림자를 정직하게 투영한 미래 예언서에 가깝다.
띠지만 보고는 인류 이후의 세계라고 해서 인류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인류가 전혀 없을 수 없지 않은가. 지구가 사라져 버리지 않는 한. 그래서 던질 수 있는 물음은 “만약 인류가 더 이상 현재의 형태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다시 태어날 것인가?”가 아닐까.
이야기는 가까운 미래, 핵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구에서 벌어지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와 그 속에서 탄생하는 ‘신인류’의 이야기를 과학적 상상력과 철학적 성찰로 풀어낸다. 역사와 과학적 사료들을 잘 배합하여서인지 정말 그럴싸하게 읽힌다. 무언가 뒷이야기가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까지 남는다.
그럼 그렇지. 결국 인류가 자폭하고 말았다. 고작 머리카락 한 타래에서 시작된 갈등으로 인간들은 핵폭탄을 마구잡이로 터뜨려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지구를 폐허로 만들어 버린다. 인류의 멸망 직전, 과학자 알리스 카메러가 ‘키메라’라는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박쥐와 인간이 결합한 에어리얼, 두더지와 인간이 결합한 디거, 돌고래와 인간이 결합한 노틱. 그들은 각각 하늘·땅·바다라는 다른 차원을 점유하며, 지구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한다.
즉 작가는 더 이상 인간 중심의 진화가 아닌, 인간+타자의 조합을 통해서만 미래가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밀어붙인다.
신인류를 통해 생존은 더 강한 종이 아니라 더 다양하고 유연한 종의 몫이라는 다윈적 진실을 다시 강조한다. 이처럼 신인류는 변화에 대한 은유이자, 우리가 ‘다름’을 어떻게 수용할지 묻는 장치로 작용한다. 어찌 보면 인간 우월주의나 주인의식 따위는 이제 내려놓아야 되지 않을까.
1권이 ‘창조’와 ‘적응’의 서사라면, 2권은 그다음 단계인 공존을 둘러싼 정치적·심리적 투쟁에 집중한다. 하늘·땅·바다를 점유한 혼종들은 각자의 생존 논리와 문화적 형식을 발달시켰고, 그 차이는 곧 자원·영토·기억을 둘러싼 충돌로 표출된다.
하늘을 점유한 혼종이 더 유리한 환경에 놓인다거나 인간에게 제일 많이 시달린 바다를 점유한 혼종이 타 혼종 그리고 사피엔스와 적을 둔다든지 하는 설정 말이다. 아! 디거왕이 알리스에게 구애를 할 때 동화 <엄지 공주>가 떠올라 웃어버린 지점도 있었다.
베르베르는 이 갈등을 통해 1권에서 제기된 과학자의 윤리적 책임 문제를 ‘현실 정치’로 옮겨온다. 여기에 더해서 새로운 종의 탄생은 서양에서 말하는 만물의 질서인 네 가지<지수화공)를 채워 세계질서 유지를 위한 전략적 선택(생태계 전체 균형과 다양성 확보) 이자 반복되는 폭력의 사이클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작가의 인터뷰에서 왜 굳이 도롱뇽이었냐는 물음에 대한 답을 보면서 멸종 위기종에 대한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었다는 점도 보인다.
혼종이 인류의 동반자이자 후계자인지 아니면 심판자이자 경계자로 남을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처음에 알리스는 자신을 구세주적 과학자로 여긴다. 인류는 위대하니까. 반면 사피엔스는 협력 능력을 갖지만, 동시에 내부 갈등과 폭력을 반복한다.
이에 혼종이야말로 인류의 생존을 위한 필연적 해답이라고 확신한다. 이때 그녀는 혼종들을 실험적 산물이자 구원의 도구로 바라본다.
하지만 혼종들이 점차 성장하면서, 알리스는 예상치 못한 특징들을 목격한다. 그들은 인간적 감정과 동물적 본능이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존재로 나타난 것이다. 알리스는 (난 내 창조물들을 내 자식처럼 여기지만, 동등한 존재로 대하지 안-p.80) 음을 인정한다. 특히 노틱들이 사피엔스를 실패한 선행자로 인식하며 냉정한 면모를 보일 때 엄청난 후회감에 사로잡힌다.
그렇다면 그녀가 간과한 지점은 무엇일까.
알리스는 특정 환경(하늘, 땅, 바다)에 맞는 생존 능력을 유전학적으로 결합하면 생존력이 강화될 것이라 믿는다. 이는 그녀가 인간성에 대한 면면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것이다. 알리스의 연구는 생물학적 차원에만 집중되었고 지나치게 유토피아적 관점을 지녔다. 이러한 지점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드러난다. 진정한 진화는 의식의 변화라는 사실 말이다.
이야기가 흐르는 동안 잊고 싶지만 자꾸만 윤리적 자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 책이야말로 독서토론하기 딱이다. 정말 할말 많을 듯. )
과연 나는 신인류의 탄생을 찬성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
우리는 이미 유전자 편집, 인공지능, 인공 장기 등 신의 자리를 넘보는 과학을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음에도 앨리스의 시도는 곧 과학자의 오만일까, 아니면 인류를 위한 희생일까?
그렇듯 이야기에는 수많은 비유를 담고 있다. 구인류와 신인류의 갈등은 단순한 미래 상상이 아니다. 이는 곧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이주민, 난민, 소수자 문제의 알레고리다. 우리는 새로운 존재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우리와 다른 존재’를 위협으로만 보는가?
베르베르는 키메라라는 환상적 존재를 통해, 차이와 다름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결국 생존의 조건임을 역설한다.
그럼에도 나는 사피엔스라는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해 이 역시 당연한 과정일 뿐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알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 또한 순환의 일부임을. 어차피 인간은 어리석음을 통해 한발씩 나아가는 존재가 아니던가.
베르베르는 “다양한 종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이 작품의 핵심 주제라고 했다. 이는 분명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는 사유의 장을 펼치게 한다.
2권에서 사피엔스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한다. 노틱이 인간을 박물관 전시용으로 다루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인간과 타자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된 순간이자 인간 중심주의의 붕괴를 상징하는 장면이자 동시에 인류 문명이 다른 종의 교훈적 유물로 남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사피엔스는 파괴되지 않는다. 자연의 신비인 악셀을 탄생시켜놓은 덕분에.
이는 홀로세에서 인류세를 지나고 새 인류인 혼종의 탄생은 인류가 자연 전체를 다시 포용해야 한다는 경고 같다. 한계를 맞은 문명이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생태적 다양성과 조화를 회복해야 한다는 점을 은유한다. 지구에서 오점은 인간이라고 하지만 굳이 혼종을 내세운 까닭은 인간의 한계를 메우고 인류 중심주의를 깨뜨리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공존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은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도 다양한 이유로 충돌하고 배척하고 차별과 멸시가 끊이지 않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야말로 사피엔스의 최대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