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키메라의 땅 1~2 세트 - 전2권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김희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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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도서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상상력의 작가다.

그의 작품 세계는 개미, 뇌, 죽음, 신과 같은 거대한 주제를 택해, 그 속에 인간 문명과 의식의 한계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과학적 사실과 허구를 엮어내면서도 독자가 "만약 그렇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그는 과학적 상상력과 철학적 호기심을 연결하는 매개자라 볼 수 있다. 그의 소설은 대중적이다. 글쓰기의 간명함과 강한 이야기성이 장점이라 술술 잘 읽힌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개미>를 읽지 못하고 있다. 조만간 책장에서 꺼내야겠다.

이번 소설에 등장하는 혼종 캐릭터는 가끔 히어로물이나 SF물에서 접해서인지 새롭고 신선하다는 느낌은 덜했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글답게 인류애적 물음이 한가득이라서 좋았다. 즉 이 소설은 단순한 공상과학이 아니라, 우리가 직면한 현실의 그림자를 정직하게 투영한 미래 예언서에 가깝다.

띠지만 보고는 인류 이후의 세계라고 해서 인류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인류가 전혀 없을 수 없지 않은가. 지구가 사라져 버리지 않는 한. 그래서 던질 수 있는 물음은 “만약 인류가 더 이상 현재의 형태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다시 태어날 것인가?”가 아닐까.

이야기는 가까운 미래, 핵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구에서 벌어지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와 그 속에서 탄생하는 ‘신인류’의 이야기를 과학적 상상력과 철학적 성찰로 풀어낸다. 역사와 과학적 사료들을 잘 배합하여서인지 정말 그럴싸하게 읽힌다. 무언가 뒷이야기가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까지 남는다.

그럼 그렇지. 결국 인류가 자폭하고 말았다. 고작 머리카락 한 타래에서 시작된 갈등으로 인간들은 핵폭탄을 마구잡이로 터뜨려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지구를 폐허로 만들어 버린다. 인류의 멸망 직전, 과학자 알리스 카메러가 ‘키메라’라는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박쥐와 인간이 결합한 에어리얼, 두더지와 인간이 결합한 디거, 돌고래와 인간이 결합한 노틱. 그들은 각각 하늘·땅·바다라는 다른 차원을 점유하며, 지구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한다.

즉 작가는 더 이상 인간 중심의 진화가 아닌, 인간+타자의 조합을 통해서만 미래가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밀어붙인다.

신인류를 통해 생존은 더 강한 종이 아니라 더 다양하고 유연한 종의 몫이라는 다윈적 진실을 다시 강조한다. 이처럼 신인류는 변화에 대한 은유이자, 우리가 ‘다름’을 어떻게 수용할지 묻는 장치로 작용한다. 어찌 보면 인간 우월주의나 주인의식 따위는 이제 내려놓아야 되지 않을까.

1권이 ‘창조’와 ‘적응’의 서사라면, 2권은 그다음 단계인 공존을 둘러싼 정치적·심리적 투쟁에 집중한다. 하늘·땅·바다를 점유한 혼종들은 각자의 생존 논리와 문화적 형식을 발달시켰고, 그 차이는 곧 자원·영토·기억을 둘러싼 충돌로 표출된다.

하늘을 점유한 혼종이 더 유리한 환경에 놓인다거나 인간에게 제일 많이 시달린 바다를 점유한 혼종이 타 혼종 그리고 사피엔스와 적을 둔다든지 하는 설정 말이다. 아! 디거왕이 알리스에게 구애를 할 때 동화 <엄지 공주>가 떠올라 웃어버린 지점도 있었다.

베르베르는 이 갈등을 통해 1권에서 제기된 과학자의 윤리적 책임 문제를 ‘현실 정치’로 옮겨온다. 여기에 더해서 새로운 종의 탄생은 서양에서 말하는 만물의 질서인 네 가지<지수화공)를 채워 세계질서 유지를 위한 전략적 선택(생태계 전체 균형과 다양성 확보) 이자 반복되는 폭력의 사이클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작가의 인터뷰에서 왜 굳이 도롱뇽이었냐는 물음에 대한 답을 보면서 멸종 위기종에 대한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었다는 점도 보인다.

혼종이 인류의 동반자이자 후계자인지 아니면 심판자이자 경계자로 남을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처음에 알리스는 자신을 구세주적 과학자로 여긴다. 인류는 위대하니까. 반면 사피엔스는 협력 능력을 갖지만, 동시에 내부 갈등과 폭력을 반복한다.

이에 혼종이야말로 인류의 생존을 위한 필연적 해답이라고 확신한다. 이때 그녀는 혼종들을 실험적 산물이자 구원의 도구로 바라본다.

하지만 혼종들이 점차 성장하면서, 알리스는 예상치 못한 특징들을 목격한다. 그들은 인간적 감정과 동물적 본능이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존재로 나타난 것이다. 알리스는 (난 내 창조물들을 내 자식처럼 여기지만, 동등한 존재로 대하지 안-p.80) 음을 인정한다. 특히 노틱들이 사피엔스를 실패한 선행자로 인식하며 냉정한 면모를 보일 때 엄청난 후회감에 사로잡힌다.

그렇다면 그녀가 간과한 지점은 무엇일까.

알리스는 특정 환경(하늘, 땅, 바다)에 맞는 생존 능력을 유전학적으로 결합하면 생존력이 강화될 것이라 믿는다. 이는 그녀가 인간성에 대한 면면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것이다. 알리스의 연구는 생물학적 차원에만 집중되었고 지나치게 유토피아적 관점을 지녔다. 이러한 지점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드러난다. 진정한 진화는 의식의 변화라는 사실 말이다.

이야기가 흐르는 동안 잊고 싶지만 자꾸만 윤리적 자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 책이야말로 독서토론하기 딱이다. 정말 할말 많을 듯. )

과연 나는 신인류의 탄생을 찬성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

우리는 이미 유전자 편집, 인공지능, 인공 장기 등 신의 자리를 넘보는 과학을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음에도 앨리스의 시도는 곧 과학자의 오만일까, 아니면 인류를 위한 희생일까?

그렇듯 이야기에는 수많은 비유를 담고 있다. 구인류와 신인류의 갈등은 단순한 미래 상상이 아니다. 이는 곧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이주민, 난민, 소수자 문제의 알레고리다. 우리는 새로운 존재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우리와 다른 존재’를 위협으로만 보는가?

베르베르는 키메라라는 환상적 존재를 통해, 차이와 다름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결국 생존의 조건임을 역설한다.

그럼에도 나는 사피엔스라는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해 이 역시 당연한 과정일 뿐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알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 또한 순환의 일부임을. 어차피 인간은 어리석음을 통해 한발씩 나아가는 존재가 아니던가.

베르베르는 “다양한 종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이 작품의 핵심 주제라고 했다. 이는 분명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는 사유의 장을 펼치게 한다.

2권에서 사피엔스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한다. 노틱이 인간을 박물관 전시용으로 다루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인간과 타자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된 순간이자 인간 중심주의의 붕괴를 상징하는 장면이자 동시에 인류 문명이 다른 종의 교훈적 유물로 남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사피엔스는 파괴되지 않는다. 자연의 신비인 악셀을 탄생시켜놓은 덕분에.

이는 홀로세에서 인류세를 지나고 새 인류인 혼종의 탄생은 인류가 자연 전체를 다시 포용해야 한다는 경고 같다. 한계를 맞은 문명이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생태적 다양성과 조화를 회복해야 한다는 점을 은유한다. 지구에서 오점은 인간이라고 하지만 굳이 혼종을 내세운 까닭은 인간의 한계를 메우고 인류 중심주의를 깨뜨리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공존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은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도 다양한 이유로 충돌하고 배척하고 차별과 멸시가 끊이지 않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야말로 사피엔스의 최대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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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무법자
크리스 휘타커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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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어때?

나한테는 물어볼 필요 없어요. 난 무법자니까.

-p.90



크리스 휘타커의 <나의 작은 무법자>는 단지 범죄 소설이 아니다. 이 책은 ‘정의’와 ‘사랑’ 사이에서 끊임없이 충돌하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서사 중심에는, 세상에 분노하는 한 소녀가 있다. 하지만 한 소녀의 거침없는 투쟁기라기엔 너무나 가혹해서 분노가 인다.

13살 소녀 더치스의 삶을 보라. 어린 나이에 세상의 잔혹함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다. 엄마는 약물과 자책 속에 빠져 있고, 어린 동생 로빈은 그녀의 보호 아래 있다. 그녀는 어른보다 더 어른스럽고, 아이보다 더 상처받아 있다.

(어떤 일들은 그저 일어나지만-p.96)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저 일어난 일들로 인해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고 그 힘에 미래가 궤도에서 벗어나 -p.17)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운명의 장난은 지나치게 잔인하다. 인연은 악연이 되고 선한 자를 악인으로 둔갑시킨다. 다음 생을 기약해야 될 정도로 사연은 기구하고 안타깝다. 불행은 나쁘지만은 않았던 과거의 시간들마저도 흡수해서 더 큰 불행을 낳았다. 예측 가능할것만같던 사건도 예측불가능하게 만들만큼 쇼킹했다.

그렇게 더치스는 분노로 세상을 밀어내는 아이가 된다.

소설은 그녀의 복수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그리고 복수가 진정 구원이 될 수 있는지를 질문하며 흐른다.

빈센트의 사고는 모든 관계를 파괴하고 일그러뜨렸다. 그는 삶에 대한 의지가 희미하지만, 일정한 책임감을 품고 있다.

열다섯 살 소년이었던 시절. 그는 좋아하던 소녀(스타)의 여동생(시시)을 치어 죽였고, 감당하기 힘든 죄책감으로 더한 죄를 짓고 3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집으로 돌아왔음에도 그는 늘 벼랑 끝을 서성인다. 하지만 운명은 이번에 그를 스타의 살인범으로 지목하고 있다. 마을에서 그는 다시 위험인물로 분류되지만 절친 워크와 무법자 더치스의 시선은 엇갈린다. 무죄와 유죄 사이에 놓인 그의 운명에 나는 오해와 확신으로 갈팡질팡했는데, 설마?하는 의문까지 더해지자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는 서사의 촉매제이자 미스터리의 중심에 놓여 있다. 그리고 죄를 저지른 자이자 속죄하고자 하는 자이다.

한 미모했던 스타는 여동생의 죽음 이후 무너진 가정으로 심신이 망가져 버렸다. 상처받은 자존감과 정서적 불안정 속에 방치된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그녀의 환경은 양육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이다. 절친이었던 워크가 신경을 쓰고 있으나 그녀의 삶을 보고 있자니 그녀의 이른 죽음은 예견된 미래였는지도 모르겠다. 소녀 더치스를 세상의 끝에 서 있게 만든 것도, 분노로 이성을 잃게 만든 것도, 삶의 빛을 소멸시킨 것도 엄마다. 어린 로빈의 기억에 커다란 암흑을 드리운 것까지도.

그녀는 사회와 가족의 이중적인 폭력 속에서 버려진 존재로 무너진 어른의 상징이자, 상처받은 여성상이다.


빈센트의 죽마고우이자 경찰서장 워크는 친구들이 겪고 있는 불행의 시간을 덜고자 애쓰는 인물이다. 쓰라린 첫사랑(마사)의 아픔과 빈센트에게 빚진 마음과 무너져가는 몸뚱이까지. 그의 현재도 그다지 괜찮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가 지닌 진득한 우정과 믿음은 고독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자신이 세운 정의가 사람들을 파괴했다는 인식 아래 무력감과 자기혐오에 시달린다. 제도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나, 결국 인간적인 방식으로 책임을 완수하려 한다. 그렇듯 자신에게 남은 시간만큼은 더는 주변인들에게 불행이 퍼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친구의 무죄와 스타의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쓴다. 그 과정에서 마사와 함께하며 과거의 상처가 조금은 치유돼가는듯해 다행스럽기도 했다. 그는 과거도 잃고 친구도 둘이나 잃었으니까.


내일처럼 말하지 말라고요. -p.253



이러한 양육환경에 놓인 열세 살의 더치스는 세상을 향한 분노와 불신으로 무장했지만, 그 속엔 강한 가족애와 책임감이 숨겨져 있다.

거친 세상으로부터 엄마와 동생을 지켜내기 위해 무법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소녀의 주먹은 거침없고 언어는 거칠기 그지없다. 자신의 처지가 결코 평범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과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소녀는 더욱 독해져 간다. 눈물도 흘리지 않을 만큼. 무법자니까 '괜찮다'라는 자기 위안과 살인자를 향한 분노는 소녀를 점점 위험한 상황으로 내몬다.

엄마의 죽음과 연이은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거침없는 무법자가 되어가지만 감춰진 진실이 드러났을 때 밀려드는 안타까움 때문에 화가 나기도 했다.

어른들의 무거운 입 때문에 소비한 감정싸움에 소녀는 희생자였다. 어찌보면 어른들이 만든 잘못된 정의와 책임의 공백 속에서 스스로 정의를 구현하려는 존재가 되려 한건지도 모른다. 이 무슨 지랄맞음인가.

케이프 헤이븐, 이 지랄맞은 운명의 장난 때문일까. 갑자기 이곳의 모든 인물이 다 가엽게 느껴진다.

사건의 윤곽이 선명해질수록 더치스의 운명은 희미해지고 안락한 빛이 절실한 소녀에게 거친 황야는 자꾸만 손을 내민다. 소녀는 받아들인다. 동생을 위해 진짜 총을 든 무법자가 되기로.

소설은 더치스를 통해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사랑을 거부하면서도 결국 사랑을 원하게 되는, 한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무법자야!”라고 외친 말은 강인함의 선언이 아니라 절박함의 신호였다.

더치스는 말한다. 자신의 이야기는 하잘것없다고. 그렇지만 언젠가는 괜찮아질지도 모른다는 작은 믿음도 있다. 모든 하잘것없는 존재에게도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는 공식이 들어맞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워크 같은, 토마스 같은, 돌리 같은, 셀리 같은, 길 위에서 만난 행크와 비지 같은 다정한 존재는 필수다. 더치스의 완성된 가계도에 의미를 더할 존재들 말이다.

이것은 흔한 성장소설의 끝맺음이 아니다. 상처받은 존재가 정의로운 선택을 통해 다시 인간이 되는 서사를 보여준다

더치스는 가족의 붕괴라는 끝에서, 워크는 정의의 실패라는 끝에서, 빈센트는 과거 죄의 심연에서. 그들은 모두 끝에서 다시 시작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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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란 미래의 문학 11
데이비드 R. 번치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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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SF 고전을 여럿 작품 접해서일까. 뉴웨이브의 대표격이라고 할 만큼 문학적이고 인문적이다. 번치의 작품이 처음임에도 그 느낌이 낯설지가 않다. 할란 엘리슨과 젤라즈니의 단편들보다 나를 더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 디스토피아적 상상물은 넘쳐난다. 그럼에도 이 SF 고전이 진부하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시대를 넘어선 세련미와 유치하게 있는 척! 하는, 날것의 재미가 아닐까 한다. 마초 주인공의 자뻑이 주라고 하면 공감이 될까.

모데란의 세계는 단순하다. 마초의 세계란 게 그렇고 그렇지. 복잡할 거리도 이유도 의미도 없다. 그렇기에 이게 가능해? 이게 말이 돼?라는 식의 과학적 혹은 섬세한 접근 따위도 필요 없다. 여기엔 한 인간, 모데란이 되어 모데란을 살아가는 한 남자의 삶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철학적이고 문학적이다. 비정상적인 공포가 매력적인 만큼 날카롭고 많은 질문을 던진다. 살점을 버리고 나아가 육체마저 버리고서도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늘 그렇듯 비정상적인 욕망이 현실이 되는 세상은 암울하고 허무하다.

이야기의 시작 또한 흥미롭다. 서론만 읽었을 뿐인데 머릿속엔 엉뚱한 상상들이 한가득이다. 특정 장면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영화의 코믹스러운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내가 싸구려 쾌락용 빛줄기인 줄 알아? 싫어."라는 대사에서는 영화 <Her>도 생각났다. 남자들의 여성관이란 늘 이렇게 편협하다.

서론에는 모데란의 후손이 고대 모데란 선조의 테이프를 발견해서 이 책을 쓰게 된 과정을 얘기하고 있다. 즉 뒷이야기에서 등장하는 10번 성채가 남긴 기록으로 조잡했던 그 시대의 삶을 짐작하는 내용이다. 분량에 고꾸라질 필요는 없다. 40여 편의 무수한 짧은 단편들은 거대한 세계관을 설명하지 않는다. 10번 성채의 삶과 고뇌에 관한 에피소드를 만나다 보면 절로 살점에 흐르는 피를 가진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경애감이 든다.

기계를 수리하는 기계가 있는, 즉 죽을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된 인류가 진보하기까지는 비극적 시나리오가 필요하다. 단골 소재인 핵 전쟁과 환경 오염은 인류의 삶을 냉혹하게 한다. 이처럼 인간 혐오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다채로운 상상력을 유발한다. 인간이란 많은 면에서 끔찍하고 비열하고 부도덕한 존재며 나약하다. 인간의 신체는 더 이상 살점을 지닌 채 버틸 수가 없다. 과학의 '진보'는 모든 것을 바꾸었다. 모데란의 태초는 그렇게 탄생했다. 올데란의 삶을 견딜 수 없는 자들은 <주름도 처짐도 없는> 플라스틱 대지와 모조품 나무와 안정적 대기로 완전무결한 무균 세상을 이루어낸다. 이제 인간만 완전해지면 된다. 살점을 버리고 금속 인간이 된 10번 성채는 <그날 나비는 독수리만큼 컷다네>에서 강인한 존재로 거듭난다. 강철로 벼린 성채에서 쿵쿵 폭탄과 쾌락을 채워줄 금속 애인이면 영원의 삶을 꿈꿀 수 있다. 얼마나 짜릿한가.

<반구형 거품 주택>에 거주하는 다양한 평균 미만의 너덜너덜한 인류는 모데란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10번 성채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선택받은 자(오직 뛰어난 젊은 남성)이자 계몽된 자(어딜 감히)다. 욕망의 동력은 올데란의 비극적 삶과 실패였다. 아홉 번의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체력을 지녔다는 자부심은 허세와 허풍으로 뿜어져 나온다. 그렇다면 시간을 이겨먹은 이 감정 없는 위대한 존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인류사를 돌아보면 인간을 갉아먹는 것은 권태와 공포다. 전쟁도 그렇게 촉발되었기에 모데란의 영원을 견디기 위해 선택한 것은 전쟁이다. 증오와 복수로 불타는 자의 평범한 욕망이 비정상적인 공포를 만나 폭탄을 투하한다. 전쟁과 휴전, 파괴와 창조의 서클이 반복된다. 그렇지만 신금속 괴물과 신금속 인간 사이에는 우주를 집어삼키는 심연처럼 깊은 간극과 차이점이 존재했다. 살아남았음을 느끼고 그 의도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 감정은 조절 버튼에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펄떡펄떡 뛰는 심장이다. 심장!

번치의 디스토피아는 엉뚱하지만 진지하다. 유치하고 순진한 미친 것들에 대한 중립적 묘사와 인간 본성에 대한 화통한 냉소가 가득하다. 인간의 의미에 관해 다른 관점을 보여준 <새 왕은 웃음거리가 아니니>, 의미도 없는 휴전에 의미를 부여한 자의 허탈함에 관한 <모데란의 막간극>, 떠나지도 못할 거면서 사뭇 진지했던 삶의 목적에 대한 고민 <최종 결론>. 영혼 없는 영원의 삶에 대한 고찰과 전쟁 외전에서 보여준 풍자와 해학까지.

기억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모데란의 일상생활에서 선과 양심 그리고 사랑을 일깨운다. 모조 꽃을 피워내는 봄일지라도 계절 감각은 본능처럼 되살아 심연을 간지럽힌다. <성채안의 기묘한 그림자>에서 일렁이는 양심의 형체, 10번 성채를 아빠라 부르는 꼬마 소녀로 인해 이상이 생기는 감정 버튼과 마누라였던 그녀를 향한 질투심, 살인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영원의 지루함 등에서 모데란 종말의 전조를 예감한다. 영원의 삶도, 쾌락을 위한 전쟁도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채울 수 없다. 결국 미래 역시 과학 기술이 낳은 '오염'으로 가득할 뿐이다. 인간의 존재와 존엄의 가치는 무엇으로 되살릴 수 있을까. 마음을 앓는 이가 간절히 원하던 심장! 을 찾아야 할 텐데.


*제공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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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마치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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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세요!

여기 아무도 없어요?


만약 인생이 시간의 흐름대로 쌓아 올린 페이스트리 같다면 나는 어느 지점에 잠시 들르고 싶을까. 좋았던 시절? 혹은 무언가 바로잡고 싶은 시절? 혹은 망각의 기억 속에 꽁꽁 묻혀 있던 어느 지점?

소설 속 가상 프로그램처럼 무의식이 끄는 대로 가는 거라면 나의 무의식은 어느 지점을 서성거리게 될까.

고작 육십의 나이에 알츠하이머 위험 진단을 받은 이마치 여사는 치료를 위해 대안 치료를 받게 된다. 불치병과도 같은 알츠하이머를 고칠 수 있다고 믿는 의사 제제에게 거액의 돈을 지불한 그녀는 VR이 재생되는 동안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아니 진짜 마주한다. 마흔세 살의, 마흔 살의, 서른한 살의, 스물다섯 살의, 열다섯 살의, 아기 때의 이마치를.

이쯤 되니 활성화된 기억을 토대로 남은 기억을 유지하게 된다는 치료의 본래 목적보다는 거울 치료가 되어 그 이상의 성과가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게 된다. 기억의 오류와 오해가 낳은 상처에서 새 살이 돋아나지 않을까 하는.

가족에 대한 환상을 무참히 깨준, 오로지 자신의 인생에만 충실했던 어머니로 인해 이마치의 유년기는 두 어둠이 존재했다. 언니의 죽음이라는 어둠을 피해 극장의 어둠으로 숨어들며 삶이 전환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연극은 환희이자 살아갈 이유가 되고 어린 시절 불행은 독한 거름이 되어 견딜 정신력이 된다. 모든 감정은 오로지 연기할 때만 쏟아붓는다. 정작 현실에서 그녀의 감정은 늙을 대로 늙어 무감각하고 지쳐있다.

이마치는 삶을 마치(march) 행군(march)하듯 밀고 나갔다. 정작 배우로써 커리어와 명성이 쌓여갈수록 진짜 삶에서는 자꾸만 멀어져 간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그러다 다시 어둠이 찾아온다. 아들의 실종. 거듭되는 가짜 삶 속에서 그녀는 점차 소멸되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초라한 노파-p.103)가 되어 혼자서 서서히.



진짜 내 집은 어디죠?


기억은 왜곡투성이다. 게다가 알츠하이머로 인해 이마치의 기억은 구멍투성이다. 출현한 작품을 떠올릴 만큼의 기억력이 있지만 정점에서 그녀의 삶은 텅 비어 있었다. 가상공간이지만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60층 아파트에서 그녀를 위한 길잡이가 필요했다. 가상세계와 현실이 뒤죽박죽되어 혼란스럽던 시점에서 노아의 등장은 경계의 구분점이 된다. 자신을 몰아붙이던 시간들과 외면하고만 싶었던 시간들과 맥락도 없는 조각조각의 기억들 속에서 갈팡질팡할 때 노아는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간다. 마치 스스로 진화하는 AI처럼.

영화 <원더랜드>가 떠오른다. 출구가 없는 가상공간에서 일어난 결정적 오류가 치유의 길이 돼주던 그런 스토리였던 것 같다. 인간이든 기계든 불완전함을 극복하면서 발전하는 거니까.


인간의 기억은 부정적인 것에 훨씬 더 민감해요. -p.243

가상체험으로 그녀의 기억이 재정비되어갈 때 그녀는 불현듯 자신의 인생이 실상 초라하기 짝이 없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또한 삶이 고통으로 가득했다는 사실도.

지나치게 스스로에게 고약하고 가혹했던 시간들 속에서 진짜 사랑을 놓아버린 사실도. 덕분에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던 엄마에게는 화끈하게 복수를 한다. 반면 그나마 그녀를 그럴듯한 유년으로 포장해 주었던 마치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마저도 거짓이었다는 사실에 씁쓸히 발걸음을 옮긴다. 낭만이 낭설이었다니.

연기는 그녀를 살게 했지만 진짜 삶은 놓치고 살았다. 패턴화된 삶을 현실에까지 끌어다 놓은 것이다. 가상현실도, 꿈도 내가 원하는 대로 재정립이 가능한데 왜 진짜 삶도 가능하단 걸 모르고 살았을까.

이마치's life March. 차가운 이마치의 내면을 서서히 깨운 건 K의 존재였다. 봄빛의 따스함처럼 되살아나 그녀의 마음이 녹아가는 과정이 아름답다. 특히 가상공간에서 느낀 삶의 허기는 긍정적 신호다.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건 본능뿐이다. 한때 라파트멍 60층 그녀의 공간을 가득 채운 빵 냄새. 진짜 집에서 딸은 작은 머핀으로 변한다. -p.281 그마저도 쇠맛이 되어 사라질지라도.

무엇보다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가 즐거웠다. 상상의 완결판은 나의 마치편이란 생각이 든다. 영상화하기 완벽한 소설이다.



*출판사 제공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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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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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을지. -p.126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보다 추억을 곱씹는 횟수가 늘면 늙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그리움이든 회환이든 시절이 불러오는 감각은 어딘지 모를 쓸쓸함을 동반하니까.

작가님도 늙으셨나 보다. 이번 단편들은 중년 남자의 일기장을 들춰본 기분이다. 여전히 문체는 덤덤하고 감정의 높낮이도 없다. 아마도 시선의 깊이감 때문이리라.

익숙함 속에 불현듯 솟아나는 낯섬(오스틴)과 오래된 그림 한 점으로 되살아난 의문들(넝쿨식물)과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으로 혼란스러워지는 감정(라인벡)과 기쁨과 희열 뒤로 전류처럼 빠져나가는 불안(숨을 쉬어)과 오해와 비겁함으로 끊어진 관계(실루엣)와 존재를 자각하게 해 주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 (히메나)까지.

각각의 단편들은 소중함을 자각하게 만든다. 사라지는 것들뒤로 더 생생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p.127 는 사실도 덩달아 일깨운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 속에서 이건 영원히 살 거야. -p.67 라며 라임나무를 건네며 희망을 속삭이던 순간이나 누군가를 떠올릴 때마다 떠오르는 유쾌한 이미지가 있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문득 인생의 단순한 즐거움 -p.20 만 잘 찾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안정감을 위한 충분조건이 아닐까. 단골 식당이란 개념이 사라진 자리에 단골 브랜드가 자리를 잡은 요즘. 그런 것조차 하나 없다는 생각에 하나쯤 만들어도 좋겠다 싶다.

일생 동안 겪게 되는 삶의 변화에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뇌하고 있는듯하지만 정작 큰일은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다. 그럴 때마다 시간은 일깨운다. 살인과 죽음 같은 문제라면 그저 다 슬플 뿐 -p.14 이라는 말속에 깃든 측은함으로 삶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무심이라기보다는 무리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기도 하다. 반면 닥칠 변화 앞에 마음을 단단히 먹-p.230어야 된다는 걸 깨닫는 때도 온다. 더 이상 이전의 나로 살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첼로]의 나, 아내의 기약 없는 기다림을 받아들여야 하는 [벌]의 남편, 실종인지 사고인지 자살인지 모른 채 견뎌야 되는 [사라진 것들]의 그들은 당장 혹은 훗날의 시간에 대한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


너 어디로 간 거야? -p.24


늙어간다는 게 그닥 유쾌한 일이 아니다.

나도 최근까지는 젊다는 게 아니라 아직은 그런 척할 수 있다는-p.111 감각이 살아있다고 느끼지만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춰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서글픔이 밀려온다. 그 시절의 점과 점으로 선을 잇고 살아온 나를 추억하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있을 나를 떠올려본다. 분명한 건 지금보다는 쿰쿰해지고 마르고 쪼그라 -p.28 들어 있겠지만 섬세한, 서정적인, 부드러운-p.21 나는 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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