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아말 엘-모흐타르.맥스 글래드스턴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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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미래의 어느 지점. 징글징글한 전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어쩌면 인간 아니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만 하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다. 미래의 어느 세력이 구축하고자 하는 세계 '에이전시'와 그 세계의 균열을 위해 그들을 집요하게 쫓는 과거의 어느 세력 '가든'.

분명한 건 평화를 바라는 이들의 힘보다 전쟁을 원하는 이들의 힘이 더 세고 그들의 싸움은 더 지능적이고 교묘하며 상상을 초월한다. 에이전시의 요원 레드의 임무는 '시간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신의 '시간 타래'를 지키는 것이다. 요원들은 그저 철저히 훈련된 기계 인간 같지만 레드는 어딘지 조금 달랐다. 인공 자궁에서 태어났지만 감정에 오류가 있는.

어쩌면 블루도 직감했을는지 모른다. 그랬기에 은밀한 시도를 했을 수도.


우리는 시간 여행으로서의 편지, 시간을 여행하는 편지를 써. 겉으로는 안 보이는 의미를 담아서.-p.79

레드는 적의 편지를 발견한다. 전쟁에서 편지라니. 이 무슨 아날로그적 설정인가. 마법처럼 신기한 기술들이 넘쳐날 그 시대에. 그럼에도 편지가 갖는 '정서'라는 게 있다. 아무튼 레드는 분명 함정일 것이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인지도 알지만 읽는다. 편지의 시작은 도발적(우리는 이렇게 이길 거야.-p.19)이었지만 받을 사람과 쓴 사람에 덧붙여진 문장에서 고심한 흔적이 엿보여서인지 횟수가 거듭될수록 마치 두 친구의 교환일기를 보고 있는듯하다. 두 요원의 용의주도한 방식과 상대를 자극하는 대화가 꽤 재밌다. 다만 그들이 인용한 구절이나 문화적 지식들이 낯설어 와닿지 않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들은 상대의 편지가 언제쯤 등장할지 잘 알아차린다. 예상치 못한 조건들과 상황이 흥미롭다. 시간 가닥마다 심어놓은 힌트들. 매킨토시, 물, 불, 빛, 나이테, 물범의 내장, 펄펄 내뿜는 용암, 한 잔의 차. 그것이 운치 있는 행동인 양 과시하는 그들의 허세? 도 볼만하다.

그저 상상력이 떨어지는 나를 탓하며 드라마에서 어떻게 구현될지 무척 궁금해진다. 책은 친절하게도 색상으로 발신자를 구별해놓았다. 나 같은 독자를 위해.





단일한 '우리'는 존재하지 않거든. 그 대신 수많은 '우리들'이 있지. 우리들은 모습을 바꾸면서 서로의 사이사이에 끼어들어. -p.64

거친 시간대에 놓인 두 요원에서 두려움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얼른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의지만 보인다. 그럼에도 사뭇 진지한 태도로 돌변하는 순간이 있다. 편지의 낌새를 느낀 순간만큼은. ​

시간 타래에 은밀히 접근해 자신의 궤적을 남긴 건 블루의 작전이었지만 일탈을 즐기는 건 레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두 요원은 도발을 즐긴다. 시간은 분명 흐르는 것임에도 시간을 퇴적하듯이 편지는 오랜 기간 걸쳐 쓰인다. 상대만을 위한 언어로만 새겨진 이유 역시 그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상대와 상대가 아닌 일대 일, 너와 나만을 위한.

너한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진짜 이야기를. -p.165

비꼬임을 되받아치는 재미에 푹 빠진 모습이다. 재미를 들였는지 추신도 남발이다. 레드와 블루가 존재하는 세계의 격차는 그들의 편지에서 느껴보게 된다. 먹는 즐거움을 포기한 먼 미래. 알약 하나면 끝나는 시대에 블루의 최상급 꿀과 부드러운 치즈와 따뜻한 빵의 도발이 레드를 자극할 수 있을까마는 독자를 자극하기엔 충분하다. 오고 가는 호기심 가득한 질문은 각자의 허기를 채운다. 서로의 답장에는 상대를 제거할 독이 아닌 진정성이란 바이러스가 감지된다. 상대를 서서히 전염시키는. 그리고 '우리'가 되어 '당신들'에게 치명타를 주게 될 그것.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으니까. -p.267 라는 말과 함께 하게 될 새로운 시간 타래를 찾을 수 있기를. 이 또한 인류의 숙제이기도 하고.




토머스 채터턴의 등장은 78페이지 블루의 편지에서 언급된다.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리고 다시 한번 블루는 고백한다. 시간 가닥 141, 자신이 출생 시점이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림이 등장한다. 둘의 음모가 발각될 즈음 레드는 어느 유럽의 도시에서 지하에서 이 그림을 마주하게 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언급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는 비극적 설정임에도 소설은 희망적이다.

이 소설은 두 작가의 합작품이다. 글이 너무나 매끄럽고 자연스러워 두 사람이 쓴 것 같은 느낌은 받지 못했다. 당최 먼 소리인지 흐름이 읽히지 않는다면 레드와 블루의 편지만이라도 읽어보시라. 화려한? 미사여구에 편지가 쓰고 싶어질는지도.

여름은 토끼풀에 내려앉은 벌처럼 찾아와. 금빛으로 바쁘게 움직이다가, 왔나 하고 보면 벌써 사라지고 없거든. -p.164

말은 상처를 입히지만 은유는 중재할 줄 알아. 다리처럼. 그리고 말은 다리를 지를 때 쓰는 돌 같은 거야. 대지에서 파낼 때는 힘들지만 재료가 되지. 새로운 것, 함께 나누는 것, 하나의 묶음보다 더 많은 것을 만드는 재료. -p.173

나는 독개미와 대모벌로 너에게 편지를 쓸 거야. 상어 이빨과 가리비 껍데기로 편지를 쓸 거야. 바이러스와 너의 폐 속에 들이치는 아홉 번째 파도의 소금기로 편지를 쓸 거야. 나는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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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만나기 대작전 청어람주니어 고학년 문고 10
김명진 지음, 전명진 그림 / 청어람주니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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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자주 들여다보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오은영 박사님이 나오셔서 행동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관찰하고 부모에게 조언을 드리는 프로인데 보면서 느끼는 건 애초에 문제아는 없었고 문제 부모가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부모 역시 아이를 키우는 과정이 처음이고 새로운 환경과 상호 관계에 있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부모는 아이를 키우면서 함께 성장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힘이 들 땐 다른 사람의 조언과 상담도 받아들여야 한다.

<외계인 만나기 대작전>이라는 제목만 보면 단순히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이야기일듯하지만 어른도 함께 읽어보면 정말 좋을 책이다.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아이와 그릇된 훈육방식을 고수하던 부모. 모두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에 우리 모두의 관심이 수반되어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의 가정사에 끼어드는 걸 원치 않는 이들도 있고 내 이웃의 일에 무관심한 이들도 있어 이 책은 그만큼 의미하는 바가 크게 다가왔다. 작가는 무엇보다 이런 사안에 조심스레 다가간다. 부모의 무관심과 지나친 훈육 게다가 버릇을 고치겠다고 행해지던 과도한 체벌은 한 아이를 계속 절망으로 밀어 넣을뻔했다. 일찍 알아차린 친구들과 주변의 따스한 시선이야말로 지금과 같은 시기에 절실해 보인다.

철구는 여자친구다. 이름만 들으면 남자친구라고 여길 만한데 이름에 깃든 의미가 사뭇 진지해서 오히려 더 정감 있다. 그렇지만 철구는 그 나이 또래 여자아이답게 예쁜 이름이 탐나는 때다. 아빠에게 왜 이렇게 지었다며 따져 묻고 싶지만 철구는 아빠를 못 본 지 오래되었다. 엄마는 도통 이유를 말하지 않고 그런저런 이유로 더욱 아빠가 그리운 철구는 엄마의 도움 없이 아빠를 만날 계획을 세운다.





'아무거나 교환소'는 그렇게 문을 연다. 괜찮은 물건이 들어오면 되팔 목적이었고 그렇게 용돈을 벌어볼 심산이었다. 고 녀석 참 경제 쪽으론 될성부른 떡잎일세.ㅋㅋ

그러던 어느 날 예상외의 친구가 무당벌레 브로치를 내밀며 사라지게 해달라고 한다. 이런! 황당한 일이.

나 역시 이래저래 지칠 때면 가끔 일주일만 사라지고 싶단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니 안나 역시 그냥 재미로 사라지고 싶다며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닐 것이다. 열 두살 친구가 사라지고 싶다고 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단 얘기니까.

이야기의 시작은 가을이와 안나의 싸움으로 시작된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가을이는 무언가 억울함에 펄쩍 뛰는 입장이고 안나는 모함을 당하는 입장이다.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들은 안나를 두둔하며 가을이를 흉보기에 이른다. 억울한 가을이는 안나의 흠을 까발려서라도 자존심을 지키고자 한다. 분명 안나에겐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는듯하고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 이면에는 무언가로부터의 억압이 있는듯하다. 그랬기에 가을이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숙이고 있다.


철구는 아빠를 보겠다는 의지가 한가득이기에 얼토당토않은 안나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러자 문득 머릿속에 이미지 하나가 번뜩 떠오른다. 지하실 박스를 뒤져 찾은 노트에 적힌 촌스러운 제목 하나가 어쩌면 방법을 찾아 줄는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외계인 만나기 대작전'이라는 제목 아래 적힌 몇 가지 행동 작전을 보며 어쩌면 사라지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믿거나 말거나>라는 잡지도 영 틀린 정보를 제공하는 것 같지도 않고 또 외계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건 브로치를 돌려주고픈 마음이 없기도 했기에 철구는 일단 저지르고 본다.

외계인이 출몰했다는 장소를 찾아가기도 하고 외계인을 본 사람을 찾아보기도 한다.

철구는 계획대로 안나의 부탁을 들어주고 브로치를 팔아 아빠를 만날 수 있을까.




우연히 몇 번,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다른 세상에 혼자 떨어진 것처럼 어두워지는 안나의 얼굴을 본 적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p.26

주변에 행동이 독특한 친구를 만나면 외계인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만큼 소통이 잘 안되는 친구들을 그렇게 칭하며 가까이하기를 꺼린다. 하지만 잘 관찰해보면 그 친구들 역시 도움을 원하거나 누군가의 이해를 받고 싶어한다는걸 알게 된다.

안나의 차분함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안나는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었다. 안나의 방에서는 자주 모스 부호가 관찰된다. 그런 안나의 특징을 놓치지 않은 철구의 세심함과 유진이의 당찬 매력, 가을이의 배려심이 없었다면 안나는 진짜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을까.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에 주눅 들고 원망하며 좌절하기보다는 달라진 안나의 모습처럼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고 당당해지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흐뭇했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는 어른들의 모습도 다행스럽다.

어제 본 기사 하나가 떠오른다. 무안에서 UFO가 출현했다는 소식이었는데 영상을 보고 있으니 SF 소설이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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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와 폐허의 땅
조너선 메이버리 지음, 배지혜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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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로 귀환하는 우주탐사선 안에서 방사능으로 인해 돌연변으로 진화한 바이러스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중국에서 발생한 새로운 독감의 일종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청은 이 사단이 어느 실험실에서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모든 사람에 동의하는 사실은 이 사태가 원인 모를 질병으로 시작되었다는 것뿐이었다. -p.71​




인류에게 바이러스는 공포 그 자체다. 바이러스는 자꾸만 진화해서 인류의 삶을 뒤흔들고 있다. 어쩌면 여지껏 인간의 상상력안에서만 존재했던 좀비가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원인 모를 질병이 톰과 베니가 사는 이 땅을 오염시켜 죽은 자들을 움직이게 만들고 있으니까.



대재앙이 덮인 첫 번째 밤. 그 시간 이후로 많은 이들이 죽거나 도망을 쳐야 했다.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은 울타리를 쳐놓고 살아가야 한다. 울타리 밖은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좀비들이 득실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톰과 베니는 첫 번째 밤에 부모님을 피해 미친 듯이 도망쳐야 했다. 이미 좀비가 되어버린 아빠의 공격을 피해 엄마는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피신시키고 희생된다. 한날 두 형제는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지만 어떻게 된 연유로 각자가 지닌 그날의 의미는 너무나 달랐다. 동생 베니에겐 시간이 필요했고 그걸 누구보다 알고 있었던 형 톰은 동생의 비난을 견디고 인내하며 묵묵히 하던 일을 해 나간다.

좀비가 가득한 세상에서 이미 한차례 크나큰 상실을 경험했던 두 형제 중 톰은 세상이 아무리 비극으로 치닫고 있다고 해도 생명의 가치를 잊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은 가족들의 부탁을 받고 이미 좀비가 되어 버린 가족을 찾아가 영결식을 치르는 일을 한다. 좀비에게 영혼이 남아있다고 해야 할지, 육체만 남았다고 해야 할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끔찍한 모습으로 생명체를 뜯는 모습은 차마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다. 그렇기에 톰이 목숨 걸고 하는 일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어딜 가나 어느 시대나 어떤 상황이나 그러한 가치를 훼손하는 이들이 있다. 타인의 고통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 말이다. 찰리는 그런 자들의 대표격 인물이다.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이고 그럴듯한 행동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옳고 그름을 힘과 과시욕으로 남발하고 다니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다. 베니가 그에게 동경의 시선을 보낼 때만 해도 그가 얼마나 악랄한 자인지 눈치챌 수 없을 만큼 그럴듯하게.

시체와 폐허의 땅에서 좀비가 위험한 존재라면 찰리는 두려워해야 할 존재로 성장한다. 어딘가에 있다는 게임랜드에서 벌어지는 악랄한 범죄는 게임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현실로 옮겨 놓은듯하다. 작가가 그렇게 이름을 칭한 데는 깊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게임에 미친 나머지 현실과 가상공간의 경계가 흐릿해져 범죄를 저지르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니까. 생명의 가치를 염두에 두지 않은 참혹한 결과다.

고통과 상처와 긴장이 온 세상에 드리워져 있음에도 야생화들이 자유를 만끽하는 듯한 비현실적인 풍경이 자아내는 의미는 희망이 아닐까. 어떻게보면 무엇이 비현실적인 풍경인지 정신을 차려야한다. 톰과 베니는 찰리 일당을 저지하고 법이 사라진 곳에서 질서를 찾으려 했다. 영결식을 행하면서 얻게 된 진정한 가족의 의미와 절망 속에서도 우정과 사랑을 놓지 않으려 했다. 사라진 소녀를 찾으러 떠날 땐 그 어떤 히어로물의 주인공들보다 멋져 보였다. 무엇보다 베니는 형과의 오해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부쩍 철이 들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형과 함께 자신이 살던 집을 찾게 되는 장면은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영화화되어 준비 중이라니 기대가 된다. 물론 좀비떼의 습격을 받는 장면이나 좀비 사냥꾼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무진장 불쾌하겠지만 톰과 베니의 당당한 행보가 기대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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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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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토론 도서로 만난 구병모 작가의 첫 책이다. 책을 만나기전 작가에 대한 정보를 몰라 성별도 오해했다. 필명까지 쓸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고나니 씁쓸하긴 하다. 암튼 작가의 첫 책에서 작가의 수준 높은 문장력과 탄탄한 묘사력과 풍부한 어휘력에 감탄을 했다. 이야기 또한 현실 세계에 끼어든 상상력이 과하지 않게 흐르고 나머지 상상의 반은 독자에게 던져놓고 있어 여러모로 할 이야기가 많았다.

한 여인이 실족사할 뻔한 사연으로 이야기는 시작되지만 허우적거리는 가여운 생명에게 주어진 아가미를 가진 자가 전하는 인간미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특이한 건 시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어 진실은 모호해지지 않을까.

 

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없는 물이기도 하고. -p.22

 

그 바닥없는 물에서 누군가에 의해 들어올려진 적이 있는 '양해류'

그 바닥없는 물에서 다시 태어난 '곤'

그 바닥없는 물에서 영원히 떠돌고 있을 '윤강하'​

 

해류를 살린 곤, 곤을 살린 강하, 실종된 강하를 찾고 있는 곤, 삶의 어느 지점에서 느낀 동질감으로 인해 강하와 곤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는 해류.

이처럼 사건의 시점은 해류에게서 강하로 흐르고 다시 해류에게 흘러 곤에게 전해지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 이야기는 무언가 허점을 드러내고 그 허점 속에 캐릭터도 변화한다. 한참 삐뚤어진 캐릭터를 고수하던 강하의 이미지에 인간미가 뚝뚝 흐른 채 끝이 나버려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만큼 초반에 보여준 그의 폭력성에 예민해져 있었기 때문이리라. 곤은 시종일관 색채가 느껴지지 않는 캐릭터이기도 했고. ​

 

누군가에게 있어 가난은 더 이상 헤어 나오지 못할 저주받은 운명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선택으로 생사의 선택권이 없었던 한 아이의 운명을 삶이 가엽게 여긴 것일까. 극한의 상황에서 극적으로 진화한 아이는 물고기와 인간 양쪽 세계를 오가는 능력이 생겨난다.

기이한 변화에 신기한 것보다 양쪽 귀 뒤가 근질거리는 것이 왠지 징그러운 기분에 몰입이 안 된다.

 

그렇게 처절한 삶의 바닥에서 건져 올려진 아이는 할아버지와 강하의 보살핌으로 숨을 쉬게 된다. 그 보살핌이라는 게 더러는 구박과 폭력이 동반되기는 했으나 어미에게 버려져 애정결핍에 갈증을 느끼던 강하는 곤의 존재가 싫지만은 않다.

그 불안함과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요. -p.194

 

그럼에도 강하는 지독하게 곤에게 몹쓸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에게 아가미와 함께 속마음까지 꿰뚫는 능력이 생긴 걸까. 곤은 그저 묵묵히 모든 걸 받아들인다. 강하의 양가 대립되던 감정들이 어찌 논리적으로 설명이 될 수 있을까마는 분명한 건 강하는 곤이 다시 절망에 빠지지 않길 바랐다는 것이다.

어미의 피로 뒤덮인 현장에서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라는 말과 함께 "다시는 오지 말라"던 마지막 말속에 담긴 진한 애정에 울컥했다. 이제껏 강하가 싸지른 행동에는 사춘기 반항아의 기질도 다분했지만 곤의 특이함이 곧 위험함이라는 걸 알았던 서툰 방패막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모든 해석이 강하의 입에서 전해진 말들이 해류라는 필터를 한 번 더 거치며 이미지가 순화된 것일 수도 있다. 강하가 끝까지 곤을 증오하고 두려워했는지 아니면 진정으로 어디서든 살아만 있어주길 바란 건지 잘 모르겠다.

 

어쩜 이리도 다들 처절하게 가난할까.

해류가 물속에서 살기 위해 붙잡은 것이 자신이 가진 물건 중 가장 가벼운 핸드백 끈이었다는 대목에서 웃프다가도 상한 젖병이 나뒹구는 작은방에서조차 목숨줄을 붙잡고 있던 곤의 모습을 떠올렸을 땐 비참할 따름이다.

호수에서 건져 올려지던 시체들은 불행을 전시하고 비극은 말뚝을 박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순간 드는 생각이 뛰어내릴 때마다 곤과 같은 생명체가 그들을 물 밖으로 떠밀어 준다면 그들은 다시 살아갈까.

글쎄다. ​

 

자연의 순환만을 떠올렸을 때 강물은 흘러 바다로 가는 게 이치다. 하지만 민물고기는 바다에서 살지 못한다. 늘 강물 냄새가 나던 곤이 바다로 가서 살수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실종된 강하의 신분이 새 삶을 줄 수도 있었지만 인간 속에 스며드는 삶이 더 난관이다. 그랬기에 물 밖보다 물속에서 평온함을 찾았던 곤에게 있어 강하를 찾는 일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곳이 강이든 바다든 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물 만난 물고기가 되어 계속 헤엄쳐 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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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 삶의 지도를 확장하는 배움의 기록
이길보라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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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 책을 몇 분이 소개할 때만 해도 그저 그런 자기 계발서 정도로 여겼었다. 책은 다 때가 되면 찾아온다는 말이 어쩜 그리 맞아떨어질까. 작가의 이름이 특이해서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었는데 데프 보이스 시리즈를 통해서 이번에 연줄을 잡아보기로 했다.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이 책에는 작가의 도전기가 담겨있다. 데프 보이스에서 작가가 코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보였던 내 반응 역시 놀라움과 대단함이었다. 그렇지만 작가는 그런 정체성을 신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에서 겪은 경험담을 통해 '다름이 주는 풍성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들리지 않는 이들과 들리는 이들, 공교육과 새로운 도전 사이에서 그녀를 당차게 밀어 준 건 농인인 부모님 덕이었다. 장애를 장애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식에게만은 방법을 제시해 주던 부모님의 역할이 더 값져 보였다. 물론 코다여서 겪었을 불편함에 대해선 세세히 언급하고 있진 않지만 적지 않은 상처와 날카로운 베임이 있었을 것이다. 결혼 이야기까지 오가던 남자친구의 거절 이유에 나까지 흥분하고 분노했으니 그녀 역시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까.

 

작가님의 2년 동안의 네덜란드 고군분투기도 무척 훌륭하고 인상 깊었지만 네덜란드라는 나라가 지닌 문화성에 다시 한번 놀랐다. 이렇게 매력적으로 열린 나라라면 열정을 불태우는 과정에서 생기는 그을음마저도 나쁠 것 같지 않았다.

동성 간의 결혼을 제일 먼저 합법화한 것만 보아도 개개인의 삶과 인권을 존중했음을 알 수 있듯이 수용하고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자세가 참 좋아 보였다. 지금의 네덜란드를 만든 건 이러한 사고방식을 국민들 대다수가 받아들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인상적이었던 건 총장도 자전거를 타고 다닐 만큼 자전거가 친숙한 나라라는 점이고 다문화에 대해 협력하고 연대하려는 자세를 갖췄다는 점이다. 그러니 다양한 사람들이 모며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가능했을 것이다. 개개인의 발언권을 중시하고 저마다의 속도를 인정하는 태도,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을 기다려주던 급우들의 모습 역시 인상적이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힘든 게 유학 생활일 텐데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것들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유학자금을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시도한 건 정말 멋진 일이다.

 

우린 언제나 '정상성'과 '일반화'에 대한 질문만을 받아왔다. 그녀 역시 그런 질문들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되고 투쟁가가 되었다. 그러한 시선을 독특하게 바라본 외국인을 보며 작가가 느낀 부러움이 와닿는다.

 

개인의 예술 작업이 꼭 어떤 사회 문화적 억압으로부터 시작되지만은 않는다는 것이,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무엇보다 그가 가진, 동기들이 가진 자유로움과 유연함을 갖고 싶었다. -p.154​

 

그곳처럼 우리 사회 역시 이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국적이 어디인지, 성별이 무엇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사회적 지위가 어떠한 지도 고려 대상이 아니다. 성장기 일반적인 코스라는 것도 필요 없고 타인의 시선 또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경험에서 얻은 넘어짐 정도는 얼마든지 성장을 위한 동력임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면 정말 좋겠다. 남들이 하니까 하고 남들처럼만 하기 위해 원치 않는 길에 서서 방황하던 시절은 나 때로 끝내야겠다. 내 아이들만큼은 틀 밖에서 자유롭게, 하고 싶어 하는 대로 지지하고 응원해 주어야겠다는 결심이 선다.

 

두려움이 앞설 때 망설여질 때면 이 주문을 외워야겠다.

괜찮아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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