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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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게으름을 피우며 늦게까지 더위를 붙잡고 있던 여름을 한방에 밀어버렸다. 계절의 변화는 마치 날카로운 조각도 같았다.-p.74 나의 잠자던 감성이 드러나자 문득 파리의 가을 풍경이 궁금해진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파리와 '그녀'와 '그'가 재회한 파리는 고독하기 그지없다. 그들과 더불어 나 역시 핫초콜릿이 절실해진다.

천쓰홍 작가는 본인의 이야기를 문장화하는데 귀신이다. 더불어 여성 이야기도 잘 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차별과 혐오, 냉대와 조롱에 누구보다 감각이 열려 있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대변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초반에 들었던 직설적이고 자극적인 묘사에 대한 거부감이 오히려 그의 절실함과 간절함을 증폭시켰고, 중첩된 시간들이 하나 둘 풀려가자 캐릭터를 향한 나의 공감 능력이 최대치로 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67번째 천산갑>은 <귀신들의 땅>과 어느 정도 연장선에 놓여 있다고 보인다. 보수적이고 지독한 대만 사회에서 여성과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고난의 연속인지를, 존재하지만 귀신처럼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운 것인지를 말이다. 하지만 울분만 토해내지 않는다. 여기엔 성장이 있었다.

<67번째 천산갑>은 제목부터 낯설었다. 천산갑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 천산갑의 생김새를 처음 본 느낌은 마치 오리너구리를 보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특이한 생김새를 보며 종의 다양성에 경이감도 느껴진다. 작고 까만 눈동자가 참으로 사랑스럽다. 그렇다면 왜 천산갑일까.

대만과 천산갑의 연결고리는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참고했다. 천산갑에서 갑의 발음이 게이를 의미하는 뜻으로 변질되어 혐오 표현으로 많이 쓰인다고 한다. 과거에는 천산갑 비늘이 정력에 좋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죽어나갔다는데 최근 기사에는 멸종 위기종인 천산갑을 밀수하다 적발되는 사례도 접했다. 그런 이유로 작가는 천산갑의 이미지를 '그'에게 투영했다. "천산갑들도 그러거든" -p.122 소설에 언급된 동일시 말고도 천산갑은 자신의 환경에 매우 민감하지만 매우 수줍음이 많아서 인간을 포함한 다른 동물들과의 접촉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즉 독립적이며 혼자서도 잘 논다는 얘기다.

<귀신들의 땅>보다는 읽기가 편했다. '그녀'와 '그'만 바라보면 되기 때문이다. 역시나 뒤죽박죽이다. 현재가 먼저 열리고 영화 기법처럼 화자와 시간 전환이 수시로 있다 보니 좀 더 집중력이 필요했다. (영화화하려면 천산갑 장면은 CG로 대체하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각자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생을 따라가는 과정이 마치 실내에 어둠에 적응하면서, 흐릿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p.84 지는 기분과도 같았다. <귀신들의 땅>에서 보여준 화끈한 농담은 없지만 '그녀'와 '그'의 오래된 우정이 복원되는 과정만큼은 화끈해서 좋았다. 특히 샤넬백씬이 눈물 나게 통쾌했다.

여섯 살이던 그와 그녀는 한 매트리스 광고의 모델로 만나 영화까지 찍으며 우정을 쌓아가지만 '잠'이 지니는 너저분한 속성으로 인해 두 사람을 향한 잣대와 평가는 엇갈린다. 특히 어른들의 언어폭력(차별 언어)은 소름 그 자체다. 그렇게 그녀가 바라던 관계는 반 토막 우정으로 막을 내린듯했으나 오래전 영화가 복원되어 재상영된다는 소식은 그와 그녀를 낭트행으로 이끈다. 하지만 낭트행을 향한 두 사람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오래전 자신의 천산갑이 그리웠고 그녀는 그가 그리웠다. 그녀에게 기다림은 살아가는 동력이었고 그와의 만남을 통해 그녀는 복원되길 바랐다. 그녀는 오래전 함께여서 편안했던 그 기억을 다시 찾고 싶었다. 먼저 잠부터 푹 잔 뒤 산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을의 파리는 두 사람에게 자꾸만 여름의 기억을 들추게 한다.



아역배우 시절부터 온갖 시기와 질투, 비아냥과 냉대뿐 아니라 엄마의 무심함과 이성의 폭력에 노출된 채 성장하고 결혼한 '그녀'는 한 번도 짜릿했던 적이 없었던 자신의 생이 억울하기 그지없다. 듣지 않아도 될 말과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여과 없이 그녀의 혈관을 타고 온몸을 메마르게 한다. 한물간 그리고 천박한 배우라는 낙인은 불면의 밤 속에서 그녀를 서서히 죽여간다. 그녀는 현 남편의 선거용 조끼에 담긴 위선이 징글징글하고 잠자는 그녀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남편의 괴상한 취미에 혐오가 인다. 무엇보다 연쇄살인마(아들을 얻기까지 저지른 낙태)인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

눈물이 언어였 -p.146 고 요란한 구급차를 두려워하는 '그'에겐 정원 한구석 패배의 산을 쌓아놓을 만큼 일을 벌이는데 도가 트고 끊임없이 여자를 갈구했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불륜 현장을 찾아다니던 어머니가 있었다. 두 사람의 불협화음은 그를 침묵 속에 가둔 것도 모자라 아예 버려 버린다. 그와 그녀는 그렇게 흐릿하고, 흔들리고, 결함이 있고, 잊히고, 초점을 잃고, 색감이 없어지고, 일그러지고, 잡음이 섞인-p.135 과거를 안고 파리를 걷고 낭트로 달린다.

잘 자요~~ 잠을 잘 자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소설에서 매트리스는 중요한 소재이자 다양한 의미로 작용한다.

신형 매트리스는 그와 그녀를 잇는 매개체였고 낡은 매트리스는 억눌린 분노를 잠재우는 편안함이 된다. 아마도 그것은 오래전 그와 그녀가 버려진 후 낯선 곳에서 만난 매트리스에서의 '잠'에 기억 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된 집이 없던 그들에게 매트리스는 집이자 쉼이었다. 또한 낡은 매트리스는 그와 J와의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빨간 립스틱이 잘 어울리던 J의 죽음으로 방향을 잃은 그에게 그녀의 등장은 침묵과 소란을 뒤섞어 반쪽자리 우정을 회복하게 한다. 무엇보다 질문이 많았던 그녀의 눈빛과 말을 자꾸만 삼키는 그와의 신경전은 그녀의 아들이 남기고 간 빵부스러기(안경)로 인해 극에 치닫다 단숨에 녹는다. 결정적인 사건은 그녀의 억눌린 고통이 낳은 담석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와 그녀의 낭트행의 목적은 엉뚱한 방향의 합의점에 이른다.

너는 나의 게이미야. -p. 467

나 역시 오래전 미드 <섹스 앤 더시티>를 보면서 게이 친구에 대한 바램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 넉넉한 관계가 부러워서.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차별과 억압, 데이트 폭력과 협박까지 그녀에게 이성들은 한 번도 그녀를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메워지지 않는 구멍이 있다. 그는 그녀의 모든 순간에서 가장 고마운 존재로 그녀의 구멍을 메운다. 그에 대한 불신을 거두고 아들을 끌어안는 과정이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다.

아무러면 어때.-p. 444 라는 그녀의 한마디에서 자포자기가 아닌 시각의 유연함이 느껴져서일까. 이것이야말로 두 사람의 낡고 지난한 삶을 복원할 수 있는 생의 기술이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는 <귀신들의 땅>에서 다소 불편했던 성소수자의 고뇌를 한층 더 포용하게 된다. '페트리쇼르' 그 익숙한 슬픔의 냄새에 더 이상 두려움이 깃들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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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 제8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39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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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년 전 중학생 딸아이는 서서히 가족에서 친구라는 세계를 옮겨가며 제법 내 속을 썩였었다.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아이의 문은 단단했다. 비움과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던 그때 눈에 들어온 책이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였다. 제목에 내 감정을 담아 이 책을 선물하면서도 반신반의했다. 과연 책을 펼치기나 할까 하는. 다행히 책을 읽었고 다음 책인 <행운이 너에게 다가오는 중>도 <죽이고 싶은 아이>도 밀어내지 않았다. 휴대폰에 모든 관심사가 쏠린 딸아이에게 이번 작가의 신작이 반가운 건 당연할 터. 이참에 미처 읽지 못했던 첫 번째 책을 꺼내보았다.

며칠 전 채널을 돌리다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을 보며 이런 생각에 잠겼었다. 아날로그 정서가 그립다는. 나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함에도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박스가 있다. 상자 가득 담긴 편지와 쪽지들은 마치 누군가의 영혼이자 그 시절의 나를 유일하게 떠올려주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문명은 가속도를 내며 편리함이라는 장점을 자랑했지만 그만큼 우리의 정서는 속도에 반비례하여 일그러진 채 관계의 틈을 심하게 벌려 놓았다.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는 그런 아날로그적 감성에 타임슬립을 더한다. 현재의 편지가 과거의 어느 시점에 도달한다는 플롯은 영화 <시월애>와 책 <나미야의 잡화점>의 감성을 닮아 있지만 가족이라는 존재는 더 많이, 더 자주 이해해야 137.p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누군가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기까지 그 느린 시간의 틈에서 조바심 나는 설렘을 떠올린 채 지금은 쓰지 않는 편지의 정서를 즐기며 은유가 은유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나갔다.

은유는 엄마의 이름조차 들은 바가 없이 15년을 지나고 있다. 입을 닫아버린 어른들 때문에 은유는 중2병을 넘어 반항의 수위가 높아져만 간다. 그러다 난데없는 새엄마의 등장에 시한폭탄이 되어가던 중 아빠는 뜬금없이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쓰라는 제안을 한다. 아빠를 흉보고 가출 결심까지 적어놓은 편지는 은유에게 도착한다. 1년 뒤의 미래가 아닌 500원의 동전이 탄생하고, 연탄가스를 걱정하고, 습니다를 읍니다로 쓰던 1982년 과거의 은유에게 말이다.

자칫 작위적 설정(과거를 바꾸려는 어설픈 시도)에 식상해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작가는 그 지점을 조심스레 비껴가며 운명의 접점으로 향한다. 침묵과 무관심에서 기인한 은유의 투정과 하소연은 10살이었던 은유에게, 12살인 은유에게, 16살인 은유에게, 대학생인 은유에게 껑충껑충 전해지며 세상의 중심에 서 있던 은유를 더 너른 공간으로 이끈다. 과거의 은유는 누구보다 미래의 은유에게 적극적이다. 그 노력이 때로는 무모하다 못해 저돌적이라 웃음이 났지만 진심이 흘러가는 방향에 마음이 달콤해진다.

요즘 사회에서 꼭 필요한 화두는 '다정'이다. 가장 따스한 안도감에 마음이 일렁이던 지점이 새엄마의 이름이 등장했을 때였다. 다정씨덕에 아빠는 뒤늦게 잃어버린 미소를 되찾는다. 다정씨덕에 편지의 기적이 탄생했다. 어쩌면 과거의 은유가 보낸 선물이 다정씨가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다정씨는 특별한 존재다. 아날로그적 다정함으로 관계의 꼬인 실타래가 풀려가는 과정을 보며 회복하지 못한 채 끝나버린 아빠와의 시간이 떠올라 마음이 아려온다. 그땐 나도 어렸다. 선을 긋는게 최선이고 합리적인 삶이라고 자만했다.

그때로 돌아갔을 때 혼자가 아니었다면 달라졌을지도.

'1년 뒤 나에게, 1년 전 내가'보낸 편지에서 확신했듯 모든 게 바뀌었다. 은유는 아빠를 이해하는데 기적이 필요했지만 기시적 삶 속에서 필요한 건 대화다. 짐작은 쓸데없는 오해를 낳고 오해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비록 현재를 치유하기위해 세계를 건널 수 밖에 없었지만 편지가 흐릿해져갈수록 선명해지는 진실에 은유의 성장통을 보상받는 기분을 느꼈다.

아빠가 이제라도 딸에게 게으른 안부를 물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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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수렴청정 정희왕후 여성 인물 도서관 1
이규희 지음, 이로우 그림 / 청어람주니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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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여성들의 사회활동이나 목소리가 자유로운 시대다. 여성 정치인은 물론이고 영향력 있는 여성 CEO도 많다. 하지만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면 뛰어난 여성 인물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특히나 조선시대 유교사상은 여성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걸림돌이었다. 그럼에도 뛰어나고 특출난 여인들은 그러한 차별과 불평등한 대우를 이겨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렇기에 남성 중심의 역사 속에서 주어진 소명을 다한 여인들의 이야기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조선왕조 500년. 태동태세문단세 라고 흥얼거리며 조선왕조 계보를 외운 기억을 끄집어 내어 세조 때로 다시 돌아가 본다. 책 표지 기품 있는 정희왕후를 기억해 보기 위해서 말이다. 수양대군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그리 좋은 이미지가 아니다. 그랬기에 정희왕후의 삶에 대해서는 그리 아는 바가 없다. 마침 만화로 된 조선왕조실록을 뒤적여 보아도 정희왕후의 등장이 짧다. 대체 이 여인의 어떤 점이 특출났기에 여성 인물 도서관의 첫 번째 주인공이 되었을까.






인물 소개만 보면 정희왕후의 삶에는 희로애락과 기승전결의 굴곡이 심해 보인다. 열한 살에 제 짝을 만나 좋은 시절을 보낸 듯 하나 가족의 죽음이 그녀를 불행으로 내몰고 만다. 허나 정희왕후는 역경에 휘둘리지 않고 정신을 바짝 차려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라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역사 동화에서 인물을 그릴 때 주요한 사건보다는 인물의 에피소드를 기준으로 짚어 나가며 사건을 이해하는 편이 더 흥미롭다. 이 책도 아이들의 눈높이에 걸맞게 정희왕후의 어린 시절과 두드러졌던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녀의 운명을 뒤바꾼 결정적 요인은 당차고 쾌활한 성격이지만 어떤 자리에 있든 어떤 순간이든 도리를 다하는 모습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반면 세조에게 갑옷을 내밀 때는 진정 야심가의 면모도 보인다.

세조의 잘못이 낳은 결과는 처참했다. 정희왕후의 올곧은 내조에도 세조의 오만방자를 막을 수는 없었다. 모든 고통을 감내하며 비극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정희왕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불공을 드리며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는 것뿐이었다. 더군다나 예종의 죽음 앞에서는 한시라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정희왕후는 슬픔을 거두고 새로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나였다면 권력 암투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조정에서 뛰쳐나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정희왕후는 강단이 세고 심지가 굳은 여인임에는 틀림없다.






시대가 정희왕후에게 기회를 주었다면 정희왕후는 그 어떤 이보다 그 기회를 잘 이용했다. 그녀의 성품을 믿었기에 대신들 역시 믿고 따르지 않았을까. 정희왕후는 앉아서만 하는 정치가 아닌 직접 나서서 서민들의 삶도 살폈다.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에도 성종이 성군이 될 수 있게끔 든든한 조력자가 되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진정 현명하고 바른 정치인의 표본이 되는 사건은 그 뒤에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정치인들이 더욱 본받아야 될 자세가 아닐까 싶다.

정희왕후야말로 그림자로 머물다 빛이 된 여인이다. 그녀가 중심을 잡지 않았다면 조선 역사에 또 한 번의 참혹한 비극이 있었을지도.






독후활동지를 보면서 정희왕후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는 지문들을 읽다가 정희왕후에 대한 이야기를 더 찾아보았다.

그녀의 성품은 집안 내력으로 보인다. 집안 대대로 구설수가 없었다고 하는 점에서 말이다.




이번 도서에서 준비한 굿즈는 한복 카드다. 신년에 쓸 일이 있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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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편지 숨 쉬는 역사 14
윤자명 지음, 김주리 그림 / 청어람주니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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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숨쉬는 역사 14번째의 시대적 배경은 근현대사다. 역사가 낯설고 지루한 아이들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하고 포기하는 아이들이 수두룩하다. 반드시 알고 지나야 하는 중요한 지점임에도 말이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낯선 용어와 어려운 단어들도 한몫하지만 역사적 사실에만 치중하다 보면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역사 동화는 그런 부분보다 아이의 관점에서 보고 느끼게끔 도와준다. 그렇게 접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그 시절을 이해하고 현재 우리의 모습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1979년은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절이다. 그렇지만 지금 나조차도 멀게 느껴지는 건 대한민국의 초고속성장 때문일 것이다. 지금 아이들에게는 무척이나 생소할 것이 너도나도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생활상은 명호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형편은 큰형 학비로 인해 늘 빠듯하다. 명호의 둘째 누나는 공부를 잘했음에도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명호 역시 그래야 할지 모른다. 크레파스 색깔이 없어 반공 포스터는 엉망이 되고 닭백숙이 먹고 싶어도 대학생인 큰형이 와야만 먹을 수 있다. 육성회비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퍼붓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쫓겨가던 시절이었다. 

당시 정부는 경제발전을 이루고자 너도 나도 잘 살아보자는 취지 아래 '새마을 운동'을 강제했고 반공정신을 부추기며 기강을 잡으려 했다. 게다가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 하여 유신헌법의 정당성을 세뇌시키고 있었다. 명호가 그토록 열심히 준비했던 웅변대회도 그런 취지와 맞물려 있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지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자유는 그저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명호의 큰 형과 서울에서 공장을 다니는 둘째 누나의 소식이 끊어지자 가족들은 슬슬 걱정에 휩싸인다. 이유인즉 동네에서 들려오는 안 좋은 소식 때문이다. 서울 다니던 동네 형이 데모를 하다 경찰에 붙잡혀 갔고 뉴스에서는 반동분자니 뭐니 무서운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의 걱정은 불안감으로 바뀌고 참다못한 명호의 엄마가 길을 나선다. 허나 명호가 부산으로 향하게 되고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형을 만나게 되는데.

나라는 한 개인이 독단적으로 통제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유신헌법이 좋은 것인 줄로만 알고 있던 국민들은 그만큼 교육수준이 낮았다. 그랬기에 왜라는 의심을 품을 수조차 없었다. 그만큼 생각에 갇히면 위험하다. 나라는 국민 스스로가 개혁하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명호는 소식이 끊어진 형을 찾으러 간 현장에서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명호가 언젠가 부치게 될 편지는 그런 미래를 위한 믿음과 희망이다.







부마 민주 항쟁(1979년 10월)은 민주이념을 계승한 민주 항쟁의 하나다. 박정희 독재에 반대한 학생들과 시민에 의한 반정부 항쟁이었다. 부당한 권력에 항의하고 싸우지 않았다면 여전히 누군가의 통제와 감시 아래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명령과 복종으로부터 깨어나려면 교육이 절실하다. 지금도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며 싸우는 나라들이 많고 심지어 한국 민주주의 운동을 거울삼는 나라도 있다. 그 사실만 보아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과 의식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어 뿌듯한 일이다.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 명호가 방학숙제를 제대로 못해 쩔쩔매는 모습에 옛 기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어쩜 그리 나랑 비슷했을까. 탐구생활조차도 제대로 못해서 벼락 치기를 하고 못다 쓴 일기를 거짓으로 꾸며대느라 애쓰던 그때가 그립기까지 했다. 나와 다른 점이라면 명호는 정말로 씩씩하고 속 깊은 녀석이라는 거다. 나라면 무서워서 혼자 부산으로 갈 생각조차 못 했을 텐데. 명호에게서 용기를 배웠다. 다급해진 형이 명호에게 '빨리', '빨리'를 말하던 모습을 보며 어쩌면 대한민국의 '빨리'문화덕에 민주주의 꽃도 일찍 핀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청어람주니어 블로그에서 독서학습지를 다운받을 수 있다. 민주화 운동을 살펴보면서 조금은 진지하고 깊이 있는 생각을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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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2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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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도브]를 통해 알게 된 헨리 제임스. 그의 소설 <비둘기의 날개>를 찾다 <나사의 회전>이란 책이 눈에 들어왔다. 유령 소설이자 심리소설이란 문구가 강렬하게 나를 끌어당겼는데 무엇보다 독자들의 다양한 반응이 흥미로웠다.

나사의 회전은 헨리 제임스의 나이 55세에 발표된 소설이다. 그렇다면 제목 "나사의 회전"은 무엇을 의미할까. 8페이지에 이런 문장이 있다.

만약에 어린아이 한 명이 나사를 한 번 더 죄는 효과를 가져온다면, 어린아이가 두 명일 때는 어떻게 되겠어요? ​

중세의 건축물이 주는 분위기에서 소설적 상상력을 이끌어 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고딕소설이다. 시골에 자리 잡은 고립된 대저택과 오래된 탑, 한적한 호수 등은 유령이 출몰하기에 그럴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에서 많이 본듯한 장면들인데 이 소설의 영향을 받은 작품의 수가 꽤나 검색이 되었다. 영화 <디 아더스>나 최근작 <더 터닝>을 헨리 제임스가 보았다면 꽤나 만족스러워할듯하다. 소설의 등장인물은 고작 넷, 그리고 실체가 모호한 두 명의 유령이 전부임에도 소설의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모호한 공기는 유령의 등장으로 극대화되지만 가정교사와 아이들 간의 신경전에서 오는 공포감도 만만치 않다.

삼촌의 두 아이를 부탁받는 가정교사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가정교사가 죽은 지 이십여 년이 지난 후 당시 그녀가 남긴 경험담이 더글러스라는 인물에게 전해지는 것으로 등장하다 보니 객관성을 따지기가 모호하다. 어디까지나 가정교사 본인이 생각하고 추측하고 단정하고 결론을 지어버린 이야기이므로 유령의 존재까지도 의심이간다. 그랬기에 단서뿐인 모호한 설정은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밖에 없었고 복잡한 인간 심리에 심취하게 된다.

책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상반된 두 시선으로 인물 간의 관계도를 설정할 것이다. 어린아이의 사악함과 영웅적인 가정교사 혹은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과 정신분열증이 있는 가정교사로.

하지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엔 문장 곳곳에서 발견되는 단서들로 내내 혼돈이 온다. 심지어 그 더글러스라는 인물의 실체와 이야기에 제목을 붙인 나의 존재까지도 의심투성이다. 제일 궁금증을 증폭시켰던 건 마일스가 퇴학을 당한 이유였지만 피터 퀸스와 제셀양의 관계와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겠다는 삼촌의 의중 등 대저택에서 풍겨오는 그 어떤 것도 심증만 있을 뿐 명확한 진실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가 보았던 유령의 실체를 그로스 부인도 확인해 주었을 땐 유령의 실체를 믿을 수밖에 없었고 과거의 좋지 못했던 일들이 현재의 아이들에게까지 영향이 미치고 있음이 보인다. 한편으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나고 자란 가정교사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가 짙고 책임의식도 강하다. 어쩌면 자연의 섭리를 너무 믿은 나머지 자신이 이곳에서 선장 노릇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간단히 말해 내가 완전한 침몰을 면하기 위해 키를 움켜잡았던 것이다. -제22장) 어쩌면 지나친 애착으로 허황된 집착의 늪에 빠진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게다가 마일스와의 이성 구도는 은근 거슬린다. 마일스와의 대화 내용에서 느껴지는 줄다리기는 뭐랄까. 이성에게 호감을 품은 남녀 사이의 대화 같다고나 할까. 단언하는 가정교사보다 마일스가 그녀를 떠보는 방식이 영악해서 소름이 돋는다. ​

물론 그 무엇도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녀가 정말로 유령과 아이들 사이에서 심리전을 벌인걸 수도 있고 영매의 능력을 지닌 그녀가 유령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정신분열이 점점 심해지자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 상황에 놓여 버린 것일 수도 있다. 나역시 점점 이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그렇다면 나사의 회전은 어떤 의미일까. 8페이지의 문장만 보면 팽팽하게 조여오는 긴장감을 말한듯한데 책을 덮은 후에 드는 생각은 정신줄을 놓지 말라는 의미 같기도 하다. 소박한 인간 덕목의 나사 -p.183를 자주 죄야 할 것만 같다고나 할까.

워낙 여러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보니 번역가마다 원문을 해석하는 정도에 차이가 있어 보였다. 민음사 외 출판사의 책을 읽었던 지인들 덕에 이야기는 더 풍성해졌다. 원문에서 어쩜 그리도 다양한 문장이 나올 수가 있을까. 그리하여 나사의 회전은 독서모임용으로도 훌륭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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