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이 그림 여행 - 화가의 집 아틀리에 미술관 길 위에서 만난 예술의 숨결
엄미정 지음 / 모요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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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한 해가 넘어가는 시점에 내가 넋 놓고 바라본건 타종행사가 아닌 멋진 드론쇼였다. 어마어마한 최첨단 장비들이 선보이는 불빛 쇼. 밤하늘을 수놓은 불빛은 마치 고흐의 <론 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를 떠올리기도 했다. 빛의 향연이 만들어낸 기분좋은 설레임을 끌어안고 새해 첫날 밤을 보냈다.

 

책덕후라면 누구나 새해 첫 책을 고르는데 신중할 것이다. 며칠만 지나도 그런 의미따윈 무색해지고 늘 하던대로 살아가겠지만 '첫'이라는 한 음절이 주는 의미가 워낙에 특별해서 침대맡에 쌓아둔 책을 뒤적였다. 어젯밤의 설레임을 이어 줄 책을 고르다 그림 여행이라면 더할나위없는 선택이 될 것 같았다.

 

그나저나 누군가의 발자취만 몇권째인지... 웃음이 나지만 지금은 더욱이 그럴 수 밖에 없지 않나. 새해 아침 커피한잔 내려놓고 유럽 곳곳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따랐다. 저자는 이 책을 오래전에 준비했다. 한 예술가의 행보를 성실히 따르며 내 놓은 결실에 훗날 나의 발자취도 더해볼 수 있을까 기대해본다.

 

뒤러로 시작해 마티스로 끝맺고 있는 여행길은(그러고 보니 며칠전 마티스 특별전 알람이 떴었는데 잊고 있었네) 그림보다 인물들의 발자취에 더 초점을 두었다. 1부까지 읽고보니 확실히 작가의 생애에 좀 더 치중했음이 보인다. 여러 그림 에세이를 읽어도 매번 기억의 절반은 휘발되 버리기에 이렇게 한 작가에게 여러면의 지면을 할애한 점이 고마웠다. 그들의 생가, 작업실, 가족, 그들이 지나온 길을 지나니 자연스레 그림과 사연이 하나가 되어 다가온다. 한 예술가를 향한 시선은 어떤 순간, 어떤 공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 다를 수 밖에 없고 작가의 일생을 놓고도 감정의 농도가 다 다르기에 매번 같은 작가의 이야기를 읽어도 새롭게 다가온다. 내가 알고 있던 페르메이르의 델프트의 풍경속 '노란벽의 작은 자락'은 어느 곳을 의미할까. 이렇듯 예술작품과 문학(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 만나면 그 의미가 더 심오해진다.

 

평소 그냥 괜찮네라고 여긴 작품이지만 저자의 찬사가 자꾸만 붙게되면 정말 그렇게 보일때가 있다. 그것은 저자만의 감수성과 작품의 이야기가 더해진탓도 있지만 그렇게 이해하고 들여다보면 정말 더 좋아지는 그림들도 있다. 클림프의 <키스>를 바라보면서 여태껏 흐드러지게 핀 꽃밭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나도 실제로 그 그림을 앞에 선다면 아마 꽃밭에 시선을 못박고 있었을런지도.

 

반면 극찬을 듣고도 그 감흥을 덜 느끼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을텐데 저자는 <성삼위일체> 앞에서 그런 경험을 한다. 허나 이는 여행 후 미술관련 서적을 보다 그 이유를 알게 되는데 그림속 3차원 공간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이상적인 눈높이가 175cm라니. 음. 그렇다면 받침대 정도는 작은 이들을 위한 배려차원에서 준비해두면 안되는 것인가? ㅋ

 

저자는 여성화가를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잠시 쉴 수 밖에 없는 지경이 된다. 대체 얼마를 걸었기에 발이 퉁퉁 부은걸까. 팍팍한 일정과 정해진 시간은 이처럼 타국에서 온 관람객들의 심신을 분주하고 고달프게도 하지만 시선이 닿는 곳곳에서 전해지는 예술의 혼때문에 힘든줄도 모르고 또 걷게 되는게 아닐까. 저자가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여성화가 앙귀솔라. 난 그녀의 이름도, 그림도 처음 접했지만 왜 그토록 저자가 보고 싶어 했는지 알것만 같았다. 강렬하고 역동적인 카라바조, 신비스럽고 웅장한 엘 그레코 두 거장은 그림만큼이나 삶의 폭이 넓고 자유로웠다.

 

3부 프랑스편에서는 봐도 봐도 좋을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모네의 정원을 찾아가고 고흐의 그림속에 등장하는 노란집이 있던 자리와 카페를 둘러보기도 한다. 글로만 보던 예술가 세잔은 그곳에서 다시 보게 되는데 세잔의 정물화에서 놓친 시간성을 알게되자 나조차도 세잔이 다시 보인다. 얼마전에 살까말까 고민하던 패터 한트케의 책을 들여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여행은 아무리 잘 계획을 해도 수많은 변수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박물관이 공사중이라든가 날씨가 좋지 못하는건 부지기수다.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방문이 어려운곳도 있고 차편 실수로 제때 도착하지 못하기도 한다. 마치 내 모습인것마냥 안타깝지만 그것마저도 내겐 여행의 묘미로 다가온다. 새해 첫날 선택한 여행에 기분이 들뜬다. 그곳이 아니라서 어떤 일치의 순간이나 저릿한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작가의 생을 알고나자 강렬한 끌림은 더해졌다. 작년에 갈 수 없었던 미술관 방문 계획을 다시 짜보련다. 앙리 마티스전 알림이 다시 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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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 하늘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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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나 그들나름대로의 삶이 있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계절이 바뀌기전이나 후, 세계가 종말을 고해도 다시 누군가의 삶은 시작된다. 대지는 달을 잃고 부서졌다. 분노한 대지는 복수로 생명을 집어삼킨다. 대체 이 끔찍한 먹이사슬관계에 그 끝이 있기나 한걸까.

 

부서진 대지 그 3부작의 마지막편인 <석조 하늘>을 펼치기전 우리가 사는 이 우주와 지구에 대해 묘한 감정이 일었다. 우리는 이 거대한 천채 아래 한낱 먼지같은 존재임에도 우주와 대지를 주무르려든다. 그 대가는 오로지 일으킨자의 몫이다. 2부에서 에쑨은 오벨리스크의 문을 열었다. 그 후유증으로 그녀는 바로 깨어날수도 없었고 알라배스터가 그랬던것처럼 점차 돌이 되어간다. 그랬기에 나쑨의 비중이 커졌다. 나쑨은 드뎌 이 계절의 원리를 깨달았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엄마인 에쑨이 아닌 이 모든 계절을 끝낼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자신임을 알게된다.

 

3부에서는 현재와 과거문명을 오가며 계절의 배경을 이야기한다. '고요' 이전의 세계 즉 호아가 살았던(물론 죽지않고 지금도 살아있지만) 고대 문명 '실 아나기스트'에 대한 회상장면이 등장한다. 처음부터 특별한 종족은 없었다. 제각각인 집단의 다름따윈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정복자들이 만들어낸 거짓위에 억울한 희생자들이 있을뿐이다. 이는 현 인류가 지나온 발자취를 비꼬고 있다. 정복자들에 의해 차별과 억압, 편견과 부조리에 싸워야 하는 이들은 여전히 그 긴긴 싸움을 끝내지 못하고 있다. 어딜가나 힘의 구조는 재편된다. 각자의 목적이 다르면 절대 타협할 수 없다. 고대 문명속에서 호아의 역할도 오로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너희는 반드시 도구여야 하고 도구는 사람이 될 수 없지. -p.239 하나의 세계를 이루기위해 도구로만 존재하는 존재들. 도구의 삶을 벗어던지기위해 필요한건 타협이 아니다. 오직 혁명만이 답이다. 오래전의 규칙을 깨부수기위해 얼마나 많은 피가 대지에 뿌려지고 공기중에 흩어져갔던가.

 

에쑨과 나쑨은 조산력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느낀다. 2부에서 나쑨은 달을 위해 선택받은 자신의 능력을 깨닫는다. 엄마와 딸. 그들은 당연히 목마른 그리움으로 피어올라야 하는 관계이지만 애정의 파동은 어긋난다. 오벨리스크의 문을 열수 있는 능력을 타고 났다는 운명하나만으로 에쑨은 모든걸 잃었다. 한편 호아를 통해 나쑨의 행적을 알게 된 에쑨은 모든 일을 자책하게 된다. 딸이 자신과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다.

대지에 잡아먹힐 놈, 내가 그 애를 로 만들었어. -p.229

 

 

 

 

인류는 대지와의 싸움에 지칠대로 지쳐간다. 수호자들과 스톤이너들조차도 마찬가지다. 희망도 미래도 보이지 않던 암울한 계절 그보다 더한 것은 위험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일 놈이 되어야 하는 오로진의 운명이다. 나쑨은 그런것들을 견딜 수 없어한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증오의 화살을 더는 견딜 수 없다. 모든 걸 빼앗긴 나쑨에게 이제 남은 건 샤파뿐이다. 고대 문명의 유적인 코어포인트에 들어오게 된 나쑨은 대지의 분노를 깨닫지만 점점 의식이 혼미해져가는 샤파로 인해 이 계절을 끝내고자 결심한다.

 

"타인의 절망과 절박함을 무기로 이용하려는 자들은 항상 있었지." -p.209

선택받은 운명을 타고 났지만 그들의 운명을 손에 쥐려하는 자들은 어딜가나 있다. 그들은 교묘하게 진실을 조종해서 거짓을 믿도록 만든다. 힘의 냄새를 맡은 자들은 그 힘을 지배하기위해 모여든다. 인간적인 부분을 말살하여 하나의 도구로 쓰려는 자들. 나쑨은 이제 더이상 그 누구도 그래서는 안된다는걸 안다.

 

영원한건 없다. 그렇기에 몇천년을 살거나 불멸의 삶을 산다는 건 저주나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삶은 고통이다. 흘러가고 떠나가는 자들의 앞뒤에서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을 견뎌야만 한다. 그걸 견딜 수 없었기에 샤파는 나쑨에게 애정을 쏟았고 호아는 에쑨의 곁에 머문다.

진심은 은빛 네트워크에 서서히 스며들어 대지의 분노를 잠재울것이다. 이제 에쑨과 나쑨은 마지막 인간애를 위해 모든 힘을 쏟아 부어야 한다. 세상에 종말이 올 지언정 호아가 그랬던 것처럼 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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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31 2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건빵님 서재에 2021년 연하장 놓고 가여

2021년 새해 행복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2021년 신축년
┏━━━┓
┃※☆※ ┃🐮★
┗━━━┛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건빵과 별사탕 2020-12-31 22:57   좋아요 1 | URL
생각지도 못한 연하장에 뭉클해졌어요. 새해엔 친구분들 서재도 더 많이 들여다보는 이웃이 될께요.
늘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길 기원할께요^^
 
책과 열쇠의 계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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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이 탐정이라니. 게다가 두 친구는 딱히 단짝친구도 아니다. 단지 방과 후 도서실에서 함께 도서위원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 외엔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호리카와와 마쓰쿠라. 이 두 친구는 늘 텅빈 도서실에서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고 미반납 도서 독촉장을 쓴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선배가 도서실을 찾아와서 할아버지가 남긴 금고의 번호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첫번째 이야기를 시작으로 여섯편의 연작 단편이 실려 있는데 사건 소재들이 청소년들이 다루기에는 다소 무겁다. 물론 다행히 첫번째 이야기에서 위험한 순간이 일어날뻔 했지만 험한 일들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책과 열쇠의 계절이라는 제목만으론 무언가 굉장히 심오한 내용인가 했으나 책을 좋아하는 두 친구가 사건의 열쇠를 찾아가는 과정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배배 꼬임없이 추리하고 잘 찾아낸다. 그래서 책장은 술술 넘어간다.

성향이 다른 두 친구가 탐정놀이를 하는동안 알콩달콩 티격태격 말장난을 주고 받으며 가까워지는 장면도 보기좋았고 마지막 두 편의 이야기는 마쓰쿠라의 가족 이야기라서 둘은 좀 더 친근해지는 계기를 갖는다. 물론 마쓰쿠라는 적정선을 지켜주길 원하지만.

 

이야기속에는 좀 더 다양한 인간의 본성과 문제점들도 드러난다. 호감어린 미소뒤에 숨겨진 더러운 욕망과 인간 혐오등은 참으로 씁쓸하다.

무엇보다 사건의 본질은 단서보다 이야기에서 찾아야 한다. 그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에 더욱 집중하면 사건의 열쇠를 손에 쥐게 된다. 사람의 내면을 간파하는 능력 이것또한 탐정에게 꼭 필요한 조건이지 않을까. 그런면에서 마쓰쿠라가 더욱 예리하긴 했다. 물론 이야기는 호리카와의 시선으로 쓰여져 있기에 더욱 그런 느낌이 들수도.

 

일상 미스터리에 청소년물 같아서 난 좋았지만 좀 더 센걸 원한다면 김빠질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은 책이다. 다만 소설을 좋아한 친구가 자살한 얘기는 빼고 싶군. 추리과정에서 언급된 <바다와 독약>을 보니 장바구니에 담아 놓았다 까먹고 있었던게 떠오른다. 이참에 꼭 읽어봐야겠다.

 

두 친구가 책과 열쇠의 계절을 맘껏 즐길 수 있는 청춘이라 부러워진다. 이미 세상은 불공평하고 불공정하며 어둡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지만 두 친구의 활약으로 조금씩 밝아지는 기분이다. 이런 세상에 책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그 위안의 열쇠만 있다면 굿굿하게 헤쳐 나갈 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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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벨리스크의 문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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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라는 것에 대해 들어 본적이 있느냐."

 

방랑의 계절, 광기의 계절(산제 제국), 이빨의 계절(펄크럼), 질식의 계절(제키티), 붕괴의 계절

 

아. 그랬다. 이 세계엔 아니 이 계절엔 달이 없었다. 붕괴의 계절이후 무언가 잘못되어 달이 궤도를 이탈해서 사라져 버렸다. 이 모든것의 원인은 오로진이였기에 살아남은 인간들은 그들을 "대지가 싸지른 추잡한 괴물새끼들 -p. 67" 이라며 극도로 혐오한다. 2부에서는 엘라배스터와 에쑨의 대화에 집중하면 스토리가 그려진다. 그들이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결과가 어떤 참사를 낳았는지. 천채는 그 천채를 구성하는 모든것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우리네 삶도 그러함을 의미한다. 하늘만 올려다 봤더라면 계절이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그래서 힘이 들땐 하늘을 보라고 하는건가.ㅎㅎ)

 

어쨌든 사람이란 자기 자신과 남들로 구성된다. 하나의 존재를 최종적인 형태로 빚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다. 로 시작의 문이 열린다. 그것은 이야기가 좀 더 구체적으로 펼쳐진다는 의미다. 각자의 관계 (스톤이터, 오로진, 수호자 그리고 인간)가 어떤식으로 연결이되어 있을런지 기대하면서 읽어 나갔다. 1부에서 두리뭉실했던 관계들이 2부에서 선명해지기 시작했으며 각자의 입장에 서서 바라볼 수 있었다. 1부에서 2인칭 화자. 에쑨을 너라고 칭하던 자의 정체가 밝혀진다. 다름아닌 호아. 오~~~ 소름!! 에쑨의 수호신이라고 여겼는데 그보다 더 상위존재인듯. 어쩌다 인간이 아닌 돌로 존재하게 된건지 알 수 없지만 알라배스터가 결국 돌이 되가는 모습을 보며 오로진의 최후가 스톤이터가 아닐까.

 

10년이 지났다. 에쑨은 지하도시(카스트리마)에 머문다. 그녀와 같은 오로진이 이끄는 곳이자 그곳엔 알라배스터가 있었기에 그녀는 알라배스터에게서 대륙의 비밀을 알고자 한다. 여전히 알라배스터에 대한 증오(이 녹병삭아 문드러질 고집불통 머저리 냉혈한 같은...)를 떨쳐버질 수는 없지만 그의 죽음을 환영할 수만은 없다. 오벨리스크의 문을 열 열쇠는 그와 에쑨에게 있음을 직감했기에. 알라배스터가 모든 비밀을 한꺼번에 토해내지 않는 이유("씨발대지여, 난 너를 보호하려고 이러는거야.")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에쑨은 모든 건 자신에게 달렸음을 깨닫는다. 자신은 계속 살아갈것이므로!

 

반면 그녀의 딸 나쑨은 아버지와의 여정에서 수없이 죽을 위기를 넘기며 찾은달(오로진을 고쳐준다는 소문을 믿고)에 도착한다. 나쑨은 동생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아버지에 대한 사랑사이에서 갈등하고 에쑨에 대한 원망까지 떠안고 있다. 지자는 위기의 순간 딸의 힘으로 벗어났음에도 두려움은 커져간다. 하루빨리 그 힘을 없애 사랑스런 딸과의 일상을 꿈꾸지만 샤파의 등장으로인해 부녀사이는 끔찍한 종말을 맞게 된다.

 

한편 에쑨과의 마지막 만남이후 파괴될뻔 했던 샤파.그는 더이상 예전의 에쑨을 그려볼 수 없다. 허나 운명은 에쑨대신 나쑨을 그 앞에 데려다 놓는다. 나쑨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에쑨의 존재. 딸의 손가락을 부려버릴정도로 에쑨은 딸을 강하게 키우고자 했다. 스스로 힘의 파괴력을 조절할 수 있을때까지. 그런 냉담함때문에 나쑨은 엄마에 대한 감정이 차갑다. 그랬기에 아빠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했지만 "저 곳은 ... 저기엔 너 같은 애들이 많을 거다." 그는 절대로 '오'나 '로'가 들어간 단어를 말하지 않는다. 항상 너 같은 부류나 너희 동족 그리고 그런 족속이다.-p.160 오로진을 벌레취급하는 아빠와는 더이상 관계를 지속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에쑨이 그랬던것처럼 샤파에 대한 애정이 커져만가는데.

 

어린시절 지자는 오로진이 친구를 얼려 버리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물론 어린 오로진이 그 힘을 제어하지 못한 결과였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 이후로 오로진에 대한 분노는 한결같을 뿐이다.

짐승 새끼를 아무리 훈련하고 목줄을 달아 봤자 짐승새끼일뿐이다.-p.162 그랬기에 아들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에쑨에 대한 원망과 분노와 커져만가는 딸에 대한 애증은 오래전 친구에 대한 기억을 자꾸만 되내이게 한다. 결국 지키고 싶어했던 딸이지만 괴물취급을 하고 만다.

 

대지가 생명을 증오하는 이유는 유일한 자식을 잃었기 때문이다.-p.147 오로진의 실수로 달은 사라졌고 대지는 분노한다. 분노한 대지는 수호자를 통해 오로진을 통제하려 하지만 결국 모든것을 되돌릴 수 있는자도 오로진뿐이다. 평범한 오로진이 아닌 열개반지 이상의 힘과 능력을 가진자만이 오벨리스크의 문을 열 수 있으며 달을 제자리로 돌려 놓을 수 있다. 그래야지만 대지와 인간은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할 수 있다.

 

모든 기력을 대지에 다 쏟아붓고 돌이 되어버린 알라배스크. 그는 아들을 사랑했고 진정한 삶을 원했고 모든걸 되돌리고 싶어했다. 최후까지 온몸으로 고통을 참아내며 떠나버렸다. 어쩌면 샤파도 그렇지 않을까. 나쑨을 지켜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대지의 명령을 거역하는 고통을 감내한다. 이 모든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수호자가 되길 원하지도 않았다. 어린 샤파. 점점 잔인해져가는 샤파. 그리고 진심 사랑했던 어린 여자 아이. 목뒤에서 꿈틀대는 존재보다 특별한 존재와의 관계가 그를 더 꿈틀대게한다. 그것은 사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속에서 이해를 구할 것이다. -p.252

 

에쑨은 호아에게 넌 왜 여기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호아는 불쑥 말한다. "나한테 괜찮으냐고 물었으니까."

아무리 세계가 부서져도 아무리 세상이 피폐해져도 사랑은 존재한다. 대지와 조산력과 오벨리스크와 마법.이라는 거대한 힘말고 미래와 희망을 위한 사랑말이다.

 

전쟁은 진행형이다. 카스트리마도 위기를 맞는다. 적들은 사방에서 그들을 노리고 있다. 항복이냐 투쟁이냐의 문제가 그리 쉽지만은 않지만 그들은 싸운다. 에쑨은 펄크럼에서 배운 조산력을 왜 대지에만 집중시켰는지 깨닫는다. 조산력은 노력이 아닌 관점과 인식의 문제라는 알라배스크의 말도 한몫한다. 즉 에너지를 활용하는 것과 마법의 차이를 깨닫는다. 알라배스크가 왜 조산력을 마법이라 칭한지 이제서야 감이 온다. 마법은 힘이 필요없다. 그랬기에 에쑨은 마법을 하늘로 끌어올리는데 집중한다. 수많은 오벨리스크의 문을 향해. 그리고 나쑨은 엄마의 기운을 감지한다.

 

"달을 어떻게 집으로 데려 올 수 있는지 말해줘."

 

 

"대지여, 네가 정말로 그리웠다." - p.293 라며 한숨짓는 그의 말이 너무나 진심인걸 알기에 알라배스터가 그리울것같다. 이제 마지막 석조하늘을 펼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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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준비의 기술
박재영 지음 / 글항아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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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우울증 극복을 위한 최고의 명약! 이자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여행책이란 타이틀에 더해 정세랑 작가가 강추한다고 해서 주저 없이 들였다. 밤이 길어져서 좋다. 그렇다고 시간이 늘어난 건 아니지만 그냥 밤이 길어져서 심적 여유가 많아졌다고나 할까. 물론 전기장판 때문에 십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아침을 맞이할 때도 있지만 베개 옆에 널브러져 있는 책을 보는 게 신난다.

 

코로나 이전에도 여행과 별로 친하지 못했고 여행 계획이란 걸 잘 세우지도 않았다. 난 늘 집순이였고 집에서 두 시간 정도 이동 가능한 곳만 돌아다녔다. 전시회, 영화, 콘서트, 둘레길 산책 정도면 우울할 새가 없었다. 그럼에도 여행 준비에 관한 책에 손을 뻗친 건 내년엔 계획이란 걸 세워 제대로 다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안 하던 짓 해보기.ㅋ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책 읽는 건 좋아했다고 한다.

아무도 묻지 않는 취미를 학교에선 그렇게 묻는 게 의아했었고 그때마다 쓸게 마땅찮아 그 칸은 늘 독서로 채워 넣었다는데...

문득 학창 시절 나는 뭐라고 적었던가 떠올려 본다.

책보다는 음악을 더 좋아해서 음악 감상이라고 적었던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은 희미하네.

분명 나는 독서라고 적지는 않았다. 그땐 책하고 별로 안친했기에.ㅋㅋ

 

저자는 허세가 걷힐 때쯤엔 헛짓을 많이 했다고 한다.

쓸데없이 지하철 노선을 암기하고 커피의 세계에 입문하겠다고 유명 커피하우스를 돌아다니고 남들과는 다른 음악을 듣겠다며 청계천에 백판을 사러 다녔다고 하는데...

​그러고 보면 허세와 헛짓도 잘 하면 득이 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허세보다 헛짓을 좀 많이 하고 다닐껄하는 후회가 든다.

뭐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해도 늦진 않지만.

 

그랬던 저자는 서른 살에 자신의 취미를 찾았다고. ㅎㅎ 바로 여행 준비.^^

참, 저자의 직업은 의사지만 이미 그의 피에는 여행 DNA가 잠재되어 있었다.

그런 DNA를 가져 인생이 더 다채롭고 풍요로워졌음은 틀림없다.

 

뜬금없는 취미 소환에 나의 취미는 진짜 뭘까. 난 정말 여행을 좋아하긴 할까.

 

여행 준비는 '내가 누군인지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준다'라는 정의에 시험을 해 보면 취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듯하다.

6장에서 언급한 방법을 잘 활용하면 새해 결심도 나올듯하고 미처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할 것만 같은 기분도 든다.

국내 지도부터 먼저 붙여 놓아야겠다. 제일 먼저 가보고 싶은 도서관과 식물원을 적어 보련다. 안 해 본 먹방투어도 추가하고.

 

저자는 여행 준비를 하면서 아는 게 많아졌다고 한다. 가보지 않은 곳을 마치 다녀온 것처럼 지인들에게 추천하기도 하고 회화 공부뿐 아니라 그 나라 교통정보까지도 공부하면서 준비를 한다. 정말 제대로 준비해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게 여행인가 보다.

 

그런 노하우를 살려 베스트 스팟, 베스트 레스토랑도 소개하고 있고 경험을 바탕으로 장단점도 콕 집어주고 관련 사이트나 팁도 공유하고 있으니 여러모로 유용하겠다. 어찌 되었든 이 책은 나처럼 여행 준비와 친하지 않은 이들에게 충분히 동기부여가 된다는 점에서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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