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 시절 ㅣ 소설Q
금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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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국적, 다양한 시대의 작가들의 소설을 읽어왔지만 조선족 출신 작가의 소설을 읽은 건 이 책이 처음이다. 재일교포 작가로는 유미리가 있고 재미교포 작가로는 이민진이 있지만, 이들은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 영어로 글을 쓴다. 그에 반해 금희 작가는 한국어로 글을 쓰고 한국의 독자들에게 가장 먼저 발표한다. 그만큼 한국과 가깝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내용도 그랬다.


이야기는 주인공 '상아'가 남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해로 오면서 시작된다. 뜻밖에도 20년 전에 친하게 지냈던 '정숙 언니'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고, 마침 정숙 언니가 상해에 살아서 둘은 결혼식이 끝나고 만나기로 한다. 그 때부터 시작되는 20년 전의 이야기. 때는 1998년. 연변의 조선족 마을 남산촌에서 나고 자란 상아는 어린 시절 친구인 '무군'과 약혼 후 천진으로 간다. 상아가 무군과 약혼한 건 무군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천진에서 일하는 무군의 누나가 둘이 함께 천진으로 오면 취직을 시켜주겠다는 말에 혹해서이다. 약혼하지 않고 천진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딸의 장래가 걱정이 된 상아의 부모는 두 사람이 약혼이라도 하기를 바랐고, 두 사람은 따랐다. 


그렇게 시작된 상아의 '천진 시절'은 어떠했나. 천진에서 상아는 난생 처음 대도시를 경험했고, 직접 돈을 벌었고,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 놀랍고 신나고 행복한 순간들도 분명 있기는 했다. 하지만 대도시의 뒤편을 목격하고 환상이 깨진 적도 있었고, 뭔가를 포기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빠질 뻔하기도 했다. 무군은 착하고 성실한 남자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상아는 그의 착함과 성실함이 두 사람의 미래를 발목 잡는다고 느꼈다. 그 때부터 상아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어떻게 보면 클리셰 같은 상황이지만 어떤 것이 클리셰가 되었다는 건 그만큼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고 여전히 유의미하다는 것 아닐까.


상아처럼 지방에서 도시로 온 여자가 노동자로 일하면서 사회의 다양한 면을 경험하는 이야기가 예전에는 많았는데 근래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있다 해도 대부분 사무직 아니면 서비스직이고(최근에는 프리랜서, 자영업자 이야기가 많이 보인다), 그나마도 개인 서사에 그칠 뿐 한 시대 또는 한 사회를 담아내는 이야기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1990년대 이후 중국의 경제성장기와 조선족 사회의 변화 등을 담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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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라, 기억이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오정미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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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억이 완벽할 수 있을까. 더욱이 그 기억이 어린 시절의 것이라면.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는 제목에도 '기억'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듯이 작가 자신의 기억을 주로 담고 있다. 40대의 나이에, 그것도 고향(러시아)에 더 이상 방문할 수 없는 몸이 되어 어린 시절 기억을 회상한다는 것이 얼마나 실현 가능한 일인지(가능키나 한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읽어보니 과연 <롤리타>를 쓴 작가답게 훌륭히 해냈다.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문장들이 너무나 정교하고 아름답다. 사실이든 아니든 이런 식으로 자신의 기억을 재조립하고 간직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원하지 않을까.


나보코프는 1899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유복해 어릴 때부터 가정교사와 하인들에 둘러싸여 자랐다. 집안 환경만 보면 차르를 지지했을 것 같지만,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아버지가 개혁적인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차르의 전제정치에도 반대하고 볼셰비키 독재에도 반대했다. 결국 1917년 러시아혁명 때 피난길에 올라 영국, 독일, 프랑스를 거쳐서 1940년 미국에 정착했다. 이 책은 그가 미국에 도착한 후부터 틈틈이 써온 에세이를 엮어서 만들었다. 1951년 <결정적 증거>라는 제목으로 초판이 출간된 이후 여러 차례 수정 및 보완을 거쳐 1967년 <말하라 기억이여 - 다시 쓴 자서전>으로 완성되었다.


책에는 그의 집안, 부모님, 형제들, 가정교사들, 이웃과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아버지가 영어 교육을 중시해 그와 남동생은 어릴 때부터 영어를 배웠고, 러시아어보다 영어로 말하고 쓰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고 한다(결국 나중에 미국으로 망명했으니 미래를 예견한 것일까). 어머니는 색채에 대한 감각이 유난히 뛰어났는데 아마도 이것이 아들에게 유전되어 남다른 감각과 묘사, 표현력으로 이어진 것 같다. 그의 가족은 집안 소유의 저택이 있는 장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것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하루종일 자연에서 뛰놀며 꽃과 나무, 벌레와 동물을 관찰했고, 어느 시점부터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비에 푹 빠져 표본을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이 책을 보면 그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이야기를 짓거나 읽는 일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고, 그렇다 해도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질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러시아혁명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뒤를 따라 군인이나 법률가 또는 외교관이 되어 돈 걱정 없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이 편안한 여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광풍에 휘말리면서 생계를 위해 글을 쓸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이 책이나 <롤리타> 같은 명작이 나왔으니 불행 중 다행이랄지, 운명의 장난이랄지... 읽으면서 한 사람의 인생과 그 시대를 연결 짓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아니 에르노의 <인생>이 떠오르기도 했고, 돌아갈 수 없는 고향과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대작가의 회고록이라는 점에서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생각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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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든 것 - 삶과 영화에 대한 고백들
오정미 지음 / 무제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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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영화'라는 말이 있다. 인터넷 상의 신조어 사전에 따르면 "한 사람의 삶에서 특히 깊게 남았거나 큰 영향을 준,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는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영화 <버닝>의 각본을 쓴 오정미 작가의 첫 책 <내 모든 것>은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인생 영화를 담은, 영화를 매개로 한 인터뷰집이다. 영화인의 인터뷰집이라고 해서 영화 감독이나 배우, 스태프 등 그의 주변 영화인들을 취재한 줄 알았는데 예상과 전혀 달랐다. 보육교사인 친구, 미국 유학 실패 후유증에 시달리는 젊은 여성, 온라인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외국인 강사, 배우 지망생 출신인 인플루언서 마케터, 요가 학원 강사, 뮤지션, 크로키 모델, 구두수선집 사장님, 노숙인 등등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특별하다면 특별한 사람들의 인생 그리고 영화 이야기가 이어진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각각 한 편의 소설 같고 영화 같다. 


한 편의 영화가 한 사람의 인생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었는지를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이 책에 나오는 영화들은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본, 널리 알려진 작품들이다. <걸어도 걸어도>,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디 아워스>, <라라랜드>, <엑스맨>,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모가디슈> 등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주제나 줄거리를 익히 아는 것이 많다. 그러나 이 책의 인터뷰이들이 기억하는 영화의 명장면이나 명대사, 이 영화가 그의 삶에서 특별하게 기억된 이유 등은 짐작을 비껴가는 것이 많다. 많은 분량이 할애된 건 아니지만, 가끔 등장하는 저자 자신의 이야기도 좋았다. 사실 저자의 이름과 이력을 모른 채 이 책을 읽었고, 읽은 후에 우연히도 병렬 독서 중이었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책 <말하라 기억이여>의 역자인 걸 알았다. 러시아 문학 번역도 하고 영화 각본도 쓰신다니. 너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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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볼루셔너리 로드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6
리처드 예이츠 지음, 이삼출 옮김 / 민음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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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예이츠의 소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2008년 개봉한 케이트 윈즐릿,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 동명 영화의 원작이다. 영상화가 된 소설을 읽을 때 좋은 점 중 하나는 등장인물을 연기한 배우들의 이미지로 각각의 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는 건데, 이 소설도 그렇게 읽었다. 게다가 케이트 윈즐릿,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타이타닉>에서 이미 커플 연기를 한 적이 있다. 어떻게 보면 각 소설의 내용도 연결되는 면이 없지 않다. 중산층 진입에 성공한 듯 보이지만 내면에는 권태와 허무가 가득한 <레볼루셔너리 로드> 속 부부의 모습은, 각각 이민과 결혼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는 <타이타닉>의 주인공 잭과 로즈의 미래 같기도 하다. 


이야기의 배경은 1960년대 미국 뉴욕 외곽에 새로 생긴 중산층 거주 지역 '레볼루셔너리 로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으나 현재는 뉴욕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회사의 부품으로 살고 있는 '프랭크'와 한때는 배우를 꿈꿨으나 프랭크와 결혼 후 전업주부가 된 '에이프릴'이 이곳에 집을 사서 들어온다. 남편은 잘생기고 좋은 대학 나오고 유명한 회사 다니고, 아내는 예쁘고 조신하고 살림 잘하고, 젊은 나이에 벌써 집도 있고 딸도 있고 아들도 있는 이들은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대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작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매일이 지루하고 앞날이 기대되지 않는다. 에이프릴은 동네 사람들과 극단을 꾸려 연극을 해보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프랭크는 직장에서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젊은 여자 직원과 노닥거리다 끝내는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하디흔한 결혼 이야기 아닌가 싶은데, 작가가 여기서 변주를 준다. 열심히 준비한 연극이 실패해 크게 상심한 듯했던 에이프릴이 돌연 프랭크에게 파리로 떠나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것도 잠깐 여행으로 가는 게 아니라 아주 살러 가자고. 처음에 프랭크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동안 회사 다니기 싫다는 말을 주야장천 한 터라 파리에선 에이프릴이 일하겠다는 말에 반대하지 못한다. 파리에서 에이프릴이 일하는 동안 프랭크는 공부를 하든 책을 읽든 글을 쓰든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니 그로서는 달콤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일단 프랭크는 에이프릴에게 파리에 간다고 한다. 파리에 갈 준비는 에이프릴이 다 한다고 하니 지켜보기로 한다. 


그런데 막상 떠난다는 선택지가 생기고 보니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이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회사가 그렇게 싫었는데, 어차피 그만둘 거라는 생각으로 업무에 임하자 생각 외로 일이 너무 잘 풀렸다. 잠깐 한눈팔 생각으로 만났던 여자 직원과는 점점 관계가 깊어졌다. 그런 프랭크의 속내를 모르는 에이프릴은 조만간 파리로 뜬다는 꿈에 부풀어 전보다 더 열심히 현모양처 역할을 해낸다. 그런 아내가 사랑스러워 부부관계를 맺었다가 에이프릴의 몸에 셋째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에이프릴은 계획이 틀어져서 미칠 것 같은데, 프랭크는 계획이 틀어진 게 오히려 기쁘고 반갑다. 그렇게 두 사람의 입장 차이가 점점 더 커지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결국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생각이 많이 났다. 프랭크는 최고의 남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최악의 남편도 아니다. 경제적으로 능력 있고 1960년대 남성 치고는 가정적인 편이다. 아내가 연극하는 걸 말리지도 않았고, 아이들에게 잘못한 적도 없다. 하지만 에이프릴은 프랭크의 아내로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다. 아마도 문제는 프랭크가 아니라 '아내'라는 역할이었을 것이다. 에이프릴처럼 한때는 배우를 꿈꾸기도 했던 아름답고 똑똑하고 능력 있는 여자가 고작 '집안의 천사'로 늙어 죽는다니. 어떤 남자가 이런 삶을 살까. 이런 삶을 꿈꿀까. 셋째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에이프릴이 전에 없이 절망한 건, 파리에 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결혼의 족쇄가 더욱 강력해졌기 때문일 것이다(전래 동화 '선녀와 나무꾼'이 생각나는...). 


이 소설은 주인공인 프랭크와 에이프릴의 캐릭터도 흥미롭지만, 주변 인물로 등장하는 이웃들 - 캠벨 부부, 기빙스 부인과 아들 존 기빙스 - 의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특히 존 기빙스는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프랭크, 에이프릴과 비슷한 연배임에도 불구하고 직장도 없고 배우자와 자식도 없지만, 누구보다 빠르고 예리하고 이들 부부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각자의 속마음을 알아챈다. 프랭크, 에이프릴과 친하게 지내는 캠벨 부부는, 겉보기에는 프랭크와 에이프릴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 보이고 실제로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면도 있지만, 결코 그들이 자신들보다 잘 살기를 바라지는 않고 그들의 불행을 보면서 자신들을 위안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인간성의 이면 또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들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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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8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민음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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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S. 버로스의 소설 <퀴어>는 2022년 개봉한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 루카 구아디나노 감독 동명 영화의 원작이다.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소설을 읽었는데, 예전 퀴어 소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내용이 어둡고 우울하다. 서사가 있지만 서사 자체보다는 (약물, 알콜, 섹스 등 온갖 것들에 중독된 인물인) 주인공 '윌리엄 리'의 정신 세계를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몰입해서 읽기가 쉽지 않다. 작가가 상상으로 빚어낸 허구의 이야기가 아닌 자전 소설이라고 하니 안타깝다. 


배경은 1950년대 초 멕시코. 미국인 남성 '윌리엄 리'는 실수로 아내에게 총을 쏘아 죽게 한 혐의를 피하기 위해 미국을 떠나 멕시코시티로 온다. 사실상 돌아갈 곳이 없는 도망자 신세이지만, 리는 이곳에서 더없는 자유와 행복을 느낀다. 미국에 비해 물가도 저렴하고 자연도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남자들과 밤마다 만나고 술 마시고 연애하고 하룻밤을 보내기에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장악한 범죄와 부패, 가난과 타락 등은 금지된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정신이 멀쩡한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리에게 오히려 축복이다. 


그러나 그런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리의 연애는 생각대로 잘 흘러가지 않는다. 리가 좋아하는 젊은 남자 '앨러턴'은 리에게 별 관심이 없다(리가 가진 돈에는 관심이 있다). 리에게는 리가 좋아하지 않는 남자들만 들러붙는다(그나마도 많지 않다). 아내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 돌아갈 곳이 없다는 불안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으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도 상당하다. 결국 리는 낮에는 사람들 앞에서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광대짓을 하다가 조롱 당하고, 밤에는 성관계를 맺을 대상을 찾아다니다 허무감 또는 불면에 시달린다. 


리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상당히 불안한 사람이다. 불안 때문에 앨러턴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매달리고, 남들이 보기에는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을 해서라도 앨러턴을 자기 곁에 두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애정을 갈구하고 계속해서 자기를 봐주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을 작가는 (소수자성으로 인한) 자기 이미지 분열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소수자를 비롯한 많은 소수자들이) 소수자성을 감추고 다수자인 척 연기하며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연기 자체가 하나의 정체성이 되고, 자기 인식을 (스스로 못하고) 자신의 연기를 봐주는 관중으로 하여금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내 생각에는 성 소수자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말하기를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남들 앞에 자기를 내보이고 싶어 하는 리의 모습은, 하루 종일 SNS를 통해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고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사진 또는 영상을 공개하는 걸 개의치 않는 요즘 사람들의 성향과 비슷하지 않은가. 어쩌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고 그래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사람의 이야기, 그래서 몰입하기 힘든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나와 가장 가까운 이야기, 몰입해서 읽어볼 가치가 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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