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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라, 기억이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오정미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2월
평점 :

인간의 기억이 완벽할 수 있을까. 더욱이 그 기억이 어린 시절의 것이라면.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는 제목에도 '기억'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듯이 작가 자신의 기억을 주로 담고 있다. 40대의 나이에, 그것도 고향(러시아)에 더 이상 방문할 수 없는 몸이 되어 어린 시절 기억을 회상한다는 것이 얼마나 실현 가능한 일인지(가능키나 한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읽어보니 과연 <롤리타>를 쓴 작가답게 훌륭히 해냈다.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문장들이 너무나 정교하고 아름답다. 사실이든 아니든 이런 식으로 자신의 기억을 재조립하고 간직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원하지 않을까.
나보코프는 1899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유복해 어릴 때부터 가정교사와 하인들에 둘러싸여 자랐다. 집안 환경만 보면 차르를 지지했을 것 같지만,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아버지가 개혁적인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차르의 전제정치에도 반대하고 볼셰비키 독재에도 반대했다. 결국 1917년 러시아혁명 때 피난길에 올라 영국, 독일, 프랑스를 거쳐서 1940년 미국에 정착했다. 이 책은 그가 미국에 도착한 후부터 틈틈이 써온 에세이를 엮어서 만들었다. 1951년 <결정적 증거>라는 제목으로 초판이 출간된 이후 여러 차례 수정 및 보완을 거쳐 1967년 <말하라 기억이여 - 다시 쓴 자서전>으로 완성되었다.
책에는 그의 집안, 부모님, 형제들, 가정교사들, 이웃과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아버지가 영어 교육을 중시해 그와 남동생은 어릴 때부터 영어를 배웠고, 러시아어보다 영어로 말하고 쓰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고 한다(결국 나중에 미국으로 망명했으니 미래를 예견한 것일까). 어머니는 색채에 대한 감각이 유난히 뛰어났는데 아마도 이것이 아들에게 유전되어 남다른 감각과 묘사, 표현력으로 이어진 것 같다. 그의 가족은 집안 소유의 저택이 있는 장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것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하루종일 자연에서 뛰놀며 꽃과 나무, 벌레와 동물을 관찰했고, 어느 시점부터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비에 푹 빠져 표본을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이 책을 보면 그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이야기를 짓거나 읽는 일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고, 그렇다 해도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질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러시아혁명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뒤를 따라 군인이나 법률가 또는 외교관이 되어 돈 걱정 없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이 편안한 여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광풍에 휘말리면서 생계를 위해 글을 쓸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이 책이나 <롤리타> 같은 명작이 나왔으니 불행 중 다행이랄지, 운명의 장난이랄지... 읽으면서 한 사람의 인생과 그 시대를 연결 짓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아니 에르노의 <인생>이 떠오르기도 했고, 돌아갈 수 없는 고향과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대작가의 회고록이라는 점에서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생각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