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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8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민음사 / 2025년 5월
평점 :

윌리엄 S. 버로스의 소설 <퀴어>는 2022년 개봉한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 루카 구아디나노 감독 동명 영화의 원작이다.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소설을 읽었는데, 예전 퀴어 소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내용이 어둡고 우울하다. 서사가 있지만 서사 자체보다는 (약물, 알콜, 섹스 등 온갖 것들에 중독된 인물인) 주인공 '윌리엄 리'의 정신 세계를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몰입해서 읽기가 쉽지 않다. 작가가 상상으로 빚어낸 허구의 이야기가 아닌 자전 소설이라고 하니 안타깝다.
배경은 1950년대 초 멕시코. 미국인 남성 '윌리엄 리'는 실수로 아내에게 총을 쏘아 죽게 한 혐의를 피하기 위해 미국을 떠나 멕시코시티로 온다. 사실상 돌아갈 곳이 없는 도망자 신세이지만, 리는 이곳에서 더없는 자유와 행복을 느낀다. 미국에 비해 물가도 저렴하고 자연도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남자들과 밤마다 만나고 술 마시고 연애하고 하룻밤을 보내기에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장악한 범죄와 부패, 가난과 타락 등은 금지된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정신이 멀쩡한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리에게 오히려 축복이다.
그러나 그런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리의 연애는 생각대로 잘 흘러가지 않는다. 리가 좋아하는 젊은 남자 '앨러턴'은 리에게 별 관심이 없다(리가 가진 돈에는 관심이 있다). 리에게는 리가 좋아하지 않는 남자들만 들러붙는다(그나마도 많지 않다). 아내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 돌아갈 곳이 없다는 불안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으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도 상당하다. 결국 리는 낮에는 사람들 앞에서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광대짓을 하다가 조롱 당하고, 밤에는 성관계를 맺을 대상을 찾아다니다 허무감 또는 불면에 시달린다.
리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상당히 불안한 사람이다. 불안 때문에 앨러턴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매달리고, 남들이 보기에는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을 해서라도 앨러턴을 자기 곁에 두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애정을 갈구하고 계속해서 자기를 봐주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을 작가는 (소수자성으로 인한) 자기 이미지 분열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소수자를 비롯한 많은 소수자들이) 소수자성을 감추고 다수자인 척 연기하며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연기 자체가 하나의 정체성이 되고, 자기 인식을 (스스로 못하고) 자신의 연기를 봐주는 관중으로 하여금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내 생각에는 성 소수자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말하기를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남들 앞에 자기를 내보이고 싶어 하는 리의 모습은, 하루 종일 SNS를 통해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고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사진 또는 영상을 공개하는 걸 개의치 않는 요즘 사람들의 성향과 비슷하지 않은가. 어쩌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고 그래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사람의 이야기, 그래서 몰입하기 힘든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나와 가장 가까운 이야기, 몰입해서 읽어볼 가치가 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