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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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은 어렵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문학은 아는 만큼, 경험한 만큼 읽히는 게 아닐까요? 무작정 어렵다고, 번역이 별로라고 욕하지 마시고 찬찬히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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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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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소설과 영화, 무엇을 먼저 보아야 할까? 언젠가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이동진 평론가님은 원작 소설에 비해 영화는 생략되는 부분도 많고 해석이 다른 부분도 많기 때문에 영화를 먼저 보는 편이 실망이 덜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원작 소설의 감동을 안은 채 영화를 보는 편이 영화도 훨씬 잘 이해되고 감독의 해석과 자신의 관점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기 때문에 원작 소설을 먼저 읽는 것이 나은 것 같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도 마찬가지다. 러시아 문학은 어렵다는 편견이 있어서 읽을 엄두도 못 내고 있다가, 작년에 (<안나 카레니나>의 오마쥬라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기도 했고, 생전에 러시아어 동시통역가였던 요네하라 마리의 서평을 통해 러시아 문학에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몇 달 전부터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읽기 시작했다. 마침 개봉한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영화를 보기 전에 소설을 완독하는 것이 계획이었건만, 이런저런 다른 책들을 같이 읽다보니 총 세 권 중 2권까지밖에 못읽고 영화를 보게 되었다. 역시나, 소설을 읽고나서 본 부분과 보지 않은 부분에 대한 감상이 확연히 달랐다. (전자가 좋았고, 후자는 좋지 않았다.)


소설의 전반부에는 안나와 카레닌, 브론스키의 삼각관계와 그들의 요동치는 심리가 치밀하게 그려져 있다. 열여덟 어린 나이에 스무살 가량 나이 차이가 나는 귀족 관료 카레닌과 결혼한 안나. 오빠의 불륜소동을 해결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찾은 그녀가 브론스키와의 짧은 만남으로 인해 그 때까지 평탄하게 지내왔던 결혼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그와의 금지된 사랑에 급속히 빠져드는 과정은 그 어떤 드라마나 영화 속 러브스토리보다도 극적이고 위태로웠다. 영화에서는 그러한 안나의 갑작스러운 생활의 변화와 세 사람의 혼란스러운 관계가 연극 무대라는 장치를 빌어 속도감있고 드라마틱하게 잘 표현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후반부로 갈수록, 전반부에서는 안나와 카레닌, 브론스키의 주변 인물 정도로만 그려졌던, 키티와 레빈, 다리아, 스티바 등의 비중이 매우 높아진다. 이러한 비중의 변화는 이 소설이 단순히 안나의 불륜에서 비롯된 치정극에 그치지 않고, 시대를 대변하고 러시아를 대표하는 역사 소설이자 명작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키티와 다리아 자매는 당장의 감정과 현실적인 욕망에 치우쳐 삶을 비극으로 몰아간 안나와 달리 현실과 이상의 균형을 추구하며 감정이나 욕망보다 더 큰 행복과 진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여성들이다. 언뜻 보기에 안나는 결혼 제도와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사회 체제에 맞선 개혁적인 여성 같지만, 궁극적으로 그 개혁의 수단이 자신의 자립에 있지 않고 브론스키라는 남자에 의존하고 그의 사랑만을 구한다는 점은 모순으로 볼 수 있다. 반면 키티와 다리아는 겉보기에는 결혼과 육아에 얽매인 구체제의 여성상 같지만 실질적으로 그녀들은 스스로의 삶을 선택했고 남편보다 영리하게 대처했다. 영화에는 이런 면이 잘 그려져 있지 않아서 아쉬웠다.


또한 소설에서는 레빈이라는 인물이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아서 아쉬웠다. 영화에서 레빈은 브론스키로부터 버림받은 키티의 배우자 정도로 그려지지만, 소설에서는 이 레빈이야말로 가장 긍정적인 인간형로 나오고 - 생전에 노동과 교육의 가치를 역설했던 - 톨스토이가 가장 자신의 모습에 가깝게 창조한 캐릭터가 아닌가 싶을만큼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사회적인 부와 명예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적인 가치를 조금씩 실현해나가면서 천천히 완성되어가는 인물 레빈. 그의 이야기가 나는 안나의 사랑 이야기보다도 훨씬 인상적이었고 감동적이었다.


비록 나는 원작 소설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소설을 먼저 읽든 영화를 먼저 보든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안나 카레니나>라는 작품과 일생에 한 번은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죄와 벌>을 읽고 두번 다시 러시아 문학을 읽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내가, 이번에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면서 러시아 문학도 의외로 재미가 있고 고전문학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류 최대의 관심사인 연애와 결혼에 관한 소설이니 재미가 없을 수가 없지만, 인물 하나하나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시대상의 반영, 드라마틱한 전개 등 웬만한 현대 소설보다도 돋보이는 요소가 많은 작품이었다. 영화도 영화 자체만 놓고 보면 매우 좋았지만 (특히 연출과 미술, 의상이 매우 좋았다.) 원작 소설의 '포스'가 워낙 크다보니 그에 못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다. 무얼 먼저 보든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안나 카레니나>가 있어서 올 봄 나는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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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치매 - 머리를 쓰지 않는 똑똑한 바보들
만프레드 슈피처 지음, 김세나 옮김 / 북로드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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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가 고장났다. 아침저녁으로 영어 공부를 위해 듣던 EBS라디오와 AFKN 방송도 못 듣고, 낮에는 배경음악 삼아 듣던 FM방송도 못들으니 그야말로 고역이다. MP3 플레이어는 어머니께 빌려드렸고, 그 흔한 스마트폰도 없고, 하루종일 컴퓨터를 켜놓을 수도 없는 노릇. 갑작스런 적막도 당황스럽지만, 기계 하나 때문에 생활이 전에 비해 확연히 단조로워졌다는 사실이 황당하다.


라디오 하나 없다고 이런데, 컴퓨터나 휴대폰이 갑자기 없어지거나 고장난다면 얼마나 힘들까. <디지털 치매>를 읽으면서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디지털 치매>의 저자 만프레드 슈피처는 현재 독일 울름에 있는 대학정신병원의 병원장 및 신경학센터 소장을 역임하고 있는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뇌 연구가이자 <정신과 뇌>라는 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자다. 책에서 저자는 컴퓨터와 인터넷, 스마트 기기 등이 보급되면서 인간의 지능과 기억력이 감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현상을 '디지털 치매'라고 일컬었다. 놀랍게도 '디지털 치매'라는 용어는 저자가 처음 제시한 것이 아니라 한국이 원조다. "세계적으로 정보기술을 주도하고 있는 한국의 의사들은 이미 5년 전에 기억력 장애, 주의력 결핍 장애는 물론, 감수성 약화를 겪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점점 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러한 질병 양상을 '디지털 치매'라고 불렀다." (p.7) 세계적인 정보기술 강국인 우리나라가 디지털 치매로도 '강국'이라니,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다.


디지털 치매의 한 예로 저자는 직접 겪은 사례를 소개한다. 학자로서 저자는 어린 학생들이나 대학생들에게 이메일을 자주 받는데, 그 중에는 "뇌는 어떻게 기능합니까?" 와 같은, 마치 구글 검색을 이용하듯이 저자의 답변을 요구하는 내용의 글이 상당수 있었다. 이러한 예를 통해 저자는 오늘날의 학생들에게 배움이란 무엇인지,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의 내용이란 대체 무엇인지 추궁한다. "누군가가 자신을 산 정상에 올려놔주는 것으로 등산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학생이 전문가의 생각을 묻는 것만으로 전문가가 될 수는 없다. 지식의 본질을 자기 것으로 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의문을 제기하면서 파고들고, 퍼즐의 작은 조각들을 의미 있는 하나로 완성해나가는 것, 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직접 해봐야만 한다." (p.21)


저자는 책에서 단순히 디지털 기기가 나쁘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를 비롯하여 인류의 학습, 커뮤니케이션 도구 전반에 관한 고찰을 통해 주장을 뒷받침한다. 의학적, 과학적 자료도 풍부하게 첨부하여 신빙성을 높였다. 문제는 책이나 학술지에서나 이런 주장이 제기되지, 사람들이 자주 보는 TV나 인터넷에서는 이러한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컴퓨터와 스마트 기기를 판매하는 기업들로부터 후원을 받는 방송사, 인터넷 기업이 그러한 주장을 할 리가 없다. 게다가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고 멍청해질수록 기업가와 정치가는 유리한 법. "이들(디지털 미디어)의 약속은 예전 기계들과 동일하고, 이에 대한 자료들은 끔찍하기 그지 없다. 그런데도 시장은 디지털 미디어를 갈수록 더욱 찾고 있다. 만약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면, 왜 정치인들과 교육학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가?" (p.103)


"학교에서 디지털 미디어 사용률이 가장 높은 국가인 한국의 경우, 2010년에 이미 학생들의 12퍼센트가 인터넷에 중독되었다. 한국에서 '디지털 치매'라는 표현이 나오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만한 값을 이미 치른 것이다." 디지털 기기가 지능과 기억력에 미치는 악영향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섬뜩한 기분이 든다. 요즘은 카페, 레스토랑 등 어딜 가도 사람들이 스마트 기기를 들여다보고 있다. 심지어는 걸어다니면서, 운전하면서도 본다. 그들 모두 직장이나 가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을 터. 그런 사람들의 뇌의 능력이 점점 떨어진다면 우리 사회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아찔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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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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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시대, 디지털 시대에 기술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상상력의 세계를 표현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힘, 책의 힘을 모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그들이 그토록 찬양하는 미디어와 디지털이 사실은 문학에서, 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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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그로브의 눈물 - 소금제국의 군왕
케네디 원 지음, 서정아 옮김 / 프롬나드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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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새우가 들어간 음식을 자주 본다. 분식집이나 일식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새우 튀김, 레스토랑이나 뷔페에서 맛볼 수 있는 새우 샐러드, 새우 샌드위치, 배달 음식으로 자주 먹을 수 있는 새우(쉬림프) 피자, 새우 치킨 등등 대부분의 음식점에서 새우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새우가 많이 잡히고 값이 싸져서 많이 먹게 된 줄 알았는데 대부분이 양식 새우라고 한다. 그것도 개도국 해안가에 사는 맹그로브 늪지대 주민들의 삶을 파괴한 대가로 얻은 '피와 눈물의 새우'라고......


<맹그로브의 눈물>은 남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의 맹그로브 늪지대가 새우 양식업자들에 의해 파괴되는 현상을 취재한 르포 형식의 책이다. 저자 케네디 원은 뉴질랜드 출신의 작가, 편집자이자 사진작가로, <뉴질랜드 지오그래픽>의 공동 창립자이자 초대 편집장을 지냈으며, 2004년부터는 지구촌 곳곳의 맹그로브 늪지대를 중점적으로 촬영하며 그곳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맹그로브 늪지대에는 수많은 바다 생명체가 서식하고 있다. 늪지대 주변의 어민들은 몇천 년에 걸쳐 조상 대대로 그곳에서 어업을 하며 생활 터전을 일구어왔다. 그 중에서도 게와 새조개 어업이 유명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조차도 쉽게 할 수 없게 되었다. 바로 선진국의 거대 자본을 등에 업은 새우 양식업자들 때문이다. 현재 세계 어획량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수산양식업 중에서도 새우 양식업은 선진국의 수요가 높아 각광받고 있는 산업인데, 이들 양식업장이 땅값이 싸고 바다에 인접한 맹그로브 늪지대를 따라 만들어지면서 기존의 어업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어민들이 주로 잡는 게와 새조개의 먹이가 새우이다보니 새우 양식업자들의 눈에 어민들이 좋게 보일리가 없다. 그러다보니 충돌이 빈번하고 심지어는 어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살해 위협을 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개발도상국들의 맹그로브 공동체에서 게잡이나 새조개잡이 어부, 숯꾼, 손낚시 어부 들은 새우 양식업자들에게 두들겨 맞거나 총에 맞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심지어 살해당하기도 한다. (p.10)"


경제학을 전공했고, 그 중에서도 무역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지만, 이론적으로 올바른 것과 현실적으로 올바른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는 것 같다. 이론적으로는 대규모 자본을 가진 양식업자가 효율적으로 자본을 활용해서 업장을 늘리고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는 게 맞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환경 오염, 인체의 건강 위협, 생태계 파괴, 공동체 파괴 등 경제적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가치들을 너무 많이 잃는 것 같다. 게다가 각 나라에서 똑똑한 사람만 모여있는 정부와 국제기구가 이 같은 간극을 무시하고 기업의 편만 들어준다는 게 부당하고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그들이 주장하는 효율성이라는 것도 장기적으로 보면 이치에 안 맞는 것이고...... 앞으로 새우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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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2 12: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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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2 14: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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