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못 버린 물건들 - 은희경 산문집
은희경 지음 / 난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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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기간 동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전에는 엄두가 안 나서 하지 못했던 집 청소나 짐 정리를 실천한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소설가 은희경도 그중 한 명이다. 은희경 작가가 2023년에 출간한 산문집 <또 못 버린 물건들>에는 팬데믹 기간 3년 동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큰맘 먹고 짐 정리를 실천한 저자가 당장 쓸모는 없지만 감히 버릴 수 없었던 물건들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유행에 민감한 저자는 미니멀 라이프 열풍에 발맞추어 가볍고 단순한 삶을 살고자 했다. 때마침 이사를 하게 되어 대대적인 짐 정리가 필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생각처럼 쉬운가. 술을 좋아하는 저자가 첫 번째 책의 인세로 구입한 여섯 개들이 맥주잔이라든가, 이따금 외국에 나갈 때마다 고심 끝에 구입한 감자 칼, 구둣주걱 같은 물건들은 그것의 쓸모나 사용 빈도보다 그것에 담긴 추억 때문에 좀처럼 버릴 수가 없었다. 저자는 이러한 사정을 약간은 변명조(!)로 직접 찍은 사진을 곁들인 짧지만 재미난 이야기로 들려주는데,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고 이렇게 되뇌게 되는 것이다. "그런 물건 나도 있지. 절대 못 버리지..."


버리지 못한 물건이 많다는 건 그만큼 소중한 추억이 많다는 뜻도 된다. 추억이 많다는 건 경험이 많다는 뜻도 된다. 집에 마라톤 대회에서 받은 메달과 안 쓰는 토슈즈가 있다는 건 곧 저자가 마라톤을 해봤고 발레를 배워봤다는 것 아닌가.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며 매일 하나씩 버리는 삶을 실천하고 있지만(쉽지 않다), 저자처럼 버리고 싶어도 차마 버릴 수 없는 물건이 많은 삶이 사실은 더 바람직한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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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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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헨리 제임스의 <아메리칸>이라는 소설에 관한 소논문을 쓴 이후로 헨리 제임스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 <보스턴 사람들>을 읽은 건 이 소설이 19세기 미국의 여성참정권 운동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인데, 읽어보니 여성 참정권 운동뿐 아니라 지금도 유의미한 페미니즘 운동 관련 논쟁들이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상당히 놀랐다. 19세기 미국의 백인 남성 작가가 여성 인권 문제에 관해 이 정도까지 관심을 가지고 사유를 했다는 것이 놀랍고, 그가 목격한 여성 운동계 내부의 모습과 현대의 여성 운동계 내부의 모습이 과연 얼마나 다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은 미국 남부 출신의 변호사 베이질 랜섬이 미국 북부 보스턴에 사는 먼 사촌 올리브 챈설러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초대 당일 랜섬은 올리브의 제안으로 당시 유행하던 여성 참정권 운동 집회에 참석한다. 올리브는 당대의 대부분의 남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여성에 대해 보수적이고 편협한 사고 방식을 가진 랜섬이 집회에 참석한 여성들을 보고 충격을 받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랜섬은 여성 참정권 운동 집회의 떠오르는 스타인 버리나를 보고 첫눈에 반해 구애를 멈추지 않고, 이에 당황한 올리브는 버리나를 여성 운동계에 붙잡아 두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이 소설은 크게 보면 버리나라는 젊고 똑똑한 여성을 사이에 두고 미국 남부 출신의 보수주의자 남성 랜섬과 미국 북부를 대표하는 진보주의자 여성 올리브가 일종의 대결을 버리는 내용으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대결의 결과만 보면 작가가 여성 (참정권) 운동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예측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여성 운동에 투신한 여성이 이성애를 잃지 못해 스스로 가부장제에 복속되는 줄거리가 상당히 현실적이고, 이것(이성애 혹은 남성애)이야말로 여성 운동의 가장 큰 걸림돌이자 장벽이라는 사실을 (19세기 옛날 사람인) 작가가 잘 간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들이 결국 가장 마음에 둔 것은 이 남자뿐이었다. 투표권보다 찰리가 훨씬 더 그 여자들에게는 절실한 문제였던 것이다. (중략) 동네 젊은 여자들을 상대로 조사해보니 항상 이런 뻔뻔한 남자 애인이 그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때문에 그녀는 어느새 그런 남자를 극도로 미워하게 되었다. 그런 남자의 희생양이 되는 여자들이 그들 없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그녀와 함께 있을 때 어떤 대화를 나누든 자기들끼리 있으면 자나 깨나 그런 남자 얘기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았다)는 걸 생각하면 그녀는 화가 치밀었다. (57쪽)


이 책은 은행나무에서 2024년에 출간된 판본으로 총 728쪽에 달한다. 일반적인 소설의 2,3배 분량에 달해서 처음에는 읽을 엄두가 잘 안 났는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 이야기가 워낙 흥미진진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여성의 입장을 대표하는 올리브와 남성의 입장을 대표하는 랜섬 간의 논쟁은 오늘날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이나 SNS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별 간 대결을 떠올리게 한다. 약 138년 전에 살았던 남성들과 똑같은 소리를 하는 남성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개탄스럽지만, 그 때에도 지금도 한결같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은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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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렘 입숨의 책 - 구병모 미니픽션
구병모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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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구병모 작가의 소설 하면 어렵다는 인상이 있어서 잘 읽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어렵다는 것이 단점이 아니라 장점일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면서 구병모 작가의 소설을 일부러 찾아 읽고 있다. 2023년 안온북스에서 출간된 구병모 작가의 미니픽션집 <로렘 입숨의 책>도 그런 책 중 하나다.


이 책에는 짧은 길이의 단편 소설 열세 편이 실려 있다. 길이는 짧아도 한 편 한 편의 임팩트가 상당하다. 가령 첫 번째 단편 <화장의 도시>는 아기가 태어나면 곧바로 몸에 나노 시드를 심어서 그가 죽으면 꽃으로 피어나 그의 삶을 증명하게 하는 어느 도시의 장례 정책을 그린다. 그가 삶을 잘 살았다면 그의 시체에서 피어난 꽃이 아름답고 풍성할 것이고, 그가 삶을 잘 살지 못했다면 그의 시체에서 피어난 꽃이 볼품없거나 심지어 썩은 냄새가 날 거라는,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 원형적인 생각인데 그것을 소설로 묘사하니 환상적이면서도 기괴하다.


이어지는 단편 <신인의 유배>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나스카 지상화에 대한 상상을 담고 있다. <영 원의 꿈>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에게 꿈을 팔아 돈을 버는 일을 하게 된 청년의 이야기인데, 허구인데도 묘하게 현실의 세태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제목 '로렘 입숨의 책'은 네 번째로 실린 단편 <동사를 가질 권리>에서 힌트를 얻은 듯 보인다. '로렘 입숨'은 출판이나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 실제로 인쇄될 텍스트를 대신해 자리 채우기 용으로 사용하는 무의미한 단어 조합의 처음 두 단어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생소한 단어 또는 지식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구병모 작가 소설의 특징이다. 


<날아라 오딘>은 전쟁 시 자살 폭탄 운반용으로 쓰일 동물을 훈련시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고, <예술은 닫힌 문>은 탈락하면 문자 그대로 죽는 음악 연주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상황을 그린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단편은 <세상에 태어난 말들>인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신의 사전에서 부정적인 함의를 지닌 단어들을 지워서 인간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 단어나 개념을 없앤다고 해서 실재하는 현상이 사라지겠는가. 환상을 묘사해도 현실이 투영되는 구병모 작가의 작품 세계를 축약한 소설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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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신랑 들이기
다와다 요코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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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와다 요코 하면 일본어와 독일어로 글을 쓰는 이중 언어 작가라는 인상이 강해서 다른 이력은 몰랐는데, 이번에 <개 신랑 들

이기>를 읽고 1993년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인 걸 처음 알았다. 민음사에서 2022년에 출간한 소설집 <개 신랑 이야기>에는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개 신랑 이야기>와 <페르소나>라는 단편이 실려 있는데, 두 작품 모두 길이는 길지 않지만 형식과 내용 모두 상당히 충격적이고, 다와다 요코라는 비상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탐험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길잡이 내지는 나침반이 될 만하다.


먼저 실린 <페르소나>는 오랫동안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이 많이 반영된 듯 보인다. 주인공 미치코는 남동생 가즈오와 함께 독일에서 유학 중이다. 어느 날 독일 친구인 카타리나로부터 김성룡이라는 한국인 남성이 레나테라는 독일인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미치코는 김성룡에게 쏟아지는 인종차별적 언사에 분노를 느낀다. 가즈오는 일본인과 한국인은 입장이 다르다며 미치코를 타이르는데, 미치코는 남자라는 이유로 누나인 자신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가즈오에게 화가 난다.


<페르소나>가 1990년대 독일이 배경이라면, 이어지는 <개 신랑 들이기>는 1960년대 일본 도쿄가 배경이다. 전후 부동산 붐이 일어나 신도시 개발이 한창이던 때. 신도시와 떨어진 옛 동네에 사는 기타무라 미쓰코는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학원을 운영한다. 사람들은 나이가 적지 않은데도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없는 미쓰코에 대해 온갖 상상을 하는데, 과연 이 상상들은 진실일까 허구일까. 


다와다 요코는 1960년 생이고 <페르소나>와 <개 신랑 들이기> 모두 1990년대 초반에 발표된 작품인데, 두 작품 모두 요즘 읽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형식과 내용이 참신하고 주제 의식 면에서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어서 놀라웠다. 과연 탈냉전 이전에 독일로 이주해 디아스포라 문제를 연구하고, 국경의 제약이 사라지기 이전부터 이중 언어 실험을 해온 선구자답다. 다와다 요코의 최근작들은 다소 어려운 감이 있어서 차라리 초기작부터 읽어볼까 하는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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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걸려온 전화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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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감명 깊게 읽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전쟁을 겪는 두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를 총 3부에 걸쳐 서술한 대작인데,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워낙 강렬한 데다가 진실과 거짓말이 교차하는 서술 방식 때문에 혼란스러운 부분이 많았던 만큼 인상적이기도 했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어떻게 이런 소설을 썼는지 작가의 창작 방식이 궁금했는데,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짧은 소설 25편을 묶은 소설집 <잘못 걸려온 전화>를 읽으며 약간의 힌트를 얻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은 대부분 길이가 매우 짧다. 어떤 소설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산문이나 차라리 시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길이와 상관 없이 찰나의 어떤 장면이나 상황이 무척 강렬하게 서술 또는 묘사되어 있다. 가령 맨 처음에 실린 소설 <도끼>는 숙면을 취하고 아침에 일어난 여자가 밤새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던 남편에게 이상이 생긴 걸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오직 한 인물의 대사로 전개되는 4쪽 짜리 소설이지만 몰입감과 결말의 충격은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방불케 한다.

표제작 <잘못 걸려온 전화>는 실직 이후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주인공이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타인의 과실로 인해 자신의 평온한 일상이 침해된 불쾌하고 불편한 상황이건만,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상황에 맞추어 예상 외의 반응을 보인다. 이런 식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할 만한 생각을 따르지 않는 전개가 이 소설집에는 여러 번 나온다. 이런 점 때문에 나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특별하게 느꼈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단편으로 연마된 작가의 특기가 최대한 발휘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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