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학 시절 헨리 제임스의 <아메리칸>이라는 소설에 관한 소논문을 쓴 이후로 헨리 제임스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 <보스턴 사람들>을 읽은 건 이 소설이 19세기 미국의 여성참정권 운동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인데, 읽어보니 여성 참정권 운동뿐 아니라 지금도 유의미한 페미니즘 운동 관련 논쟁들이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상당히 놀랐다. 19세기 미국의 백인 남성 작가가 여성 인권 문제에 관해 이 정도까지 관심을 가지고 사유를 했다는 것이 놀랍고, 그가 목격한 여성 운동계 내부의 모습과 현대의 여성 운동계 내부의 모습이 과연 얼마나 다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은 미국 남부 출신의 변호사 베이질 랜섬이 미국 북부 보스턴에 사는 먼 사촌 올리브 챈설러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초대 당일 랜섬은 올리브의 제안으로 당시 유행하던 여성 참정권 운동 집회에 참석한다. 올리브는 당대의 대부분의 남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여성에 대해 보수적이고 편협한 사고 방식을 가진 랜섬이 집회에 참석한 여성들을 보고 충격을 받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랜섬은 여성 참정권 운동 집회의 떠오르는 스타인 버리나를 보고 첫눈에 반해 구애를 멈추지 않고, 이에 당황한 올리브는 버리나를 여성 운동계에 붙잡아 두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이 소설은 크게 보면 버리나라는 젊고 똑똑한 여성을 사이에 두고 미국 남부 출신의 보수주의자 남성 랜섬과 미국 북부를 대표하는 진보주의자 여성 올리브가 일종의 대결을 버리는 내용으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대결의 결과만 보면 작가가 여성 (참정권) 운동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예측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여성 운동에 투신한 여성이 이성애를 잃지 못해 스스로 가부장제에 복속되는 줄거리가 상당히 현실적이고, 이것(이성애 혹은 남성애)이야말로 여성 운동의 가장 큰 걸림돌이자 장벽이라는 사실을 (19세기 옛날 사람인) 작가가 잘 간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들이 결국 가장 마음에 둔 것은 이 남자뿐이었다. 투표권보다 찰리가 훨씬 더 그 여자들에게는 절실한 문제였던 것이다. (중략) 동네 젊은 여자들을 상대로 조사해보니 항상 이런 뻔뻔한 남자 애인이 그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때문에 그녀는 어느새 그런 남자를 극도로 미워하게 되었다. 그런 남자의 희생양이 되는 여자들이 그들 없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그녀와 함께 있을 때 어떤 대화를 나누든 자기들끼리 있으면 자나 깨나 그런 남자 얘기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았다)는 걸 생각하면 그녀는 화가 치밀었다. (57쪽)


이 책은 은행나무에서 2024년에 출간된 판본으로 총 728쪽에 달한다. 일반적인 소설의 2,3배 분량에 달해서 처음에는 읽을 엄두가 잘 안 났는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 이야기가 워낙 흥미진진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여성의 입장을 대표하는 올리브와 남성의 입장을 대표하는 랜섬 간의 논쟁은 오늘날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이나 SNS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별 간 대결을 떠올리게 한다. 약 138년 전에 살았던 남성들과 똑같은 소리를 하는 남성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개탄스럽지만, 그 때에도 지금도 한결같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은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