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우스의 노래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미 문학 내부에 고대 그리스 고전을 현대적으로 각색하는 한 부류의 움직임이 있는 모양이다. 작년에 읽은 앤 카슨의 소설 <빨강의 자서전>이 헤라클레스와 그가 활로 쏘아 죽인 괴물 게리온의 이야기라면, 최근 출간된 매들린 밀러의 장편소설 <아킬레우스의 노래>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와 그의 동성 애인 파트로클로스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파트로클로스가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기대를 배신하고 급기야 한 소년을 실수로 죽이는 바람에 프티아로 쫓겨나면서 시작된다. 졸지에 왕자에서 노예로 신분이 하락한 파트로클로스는 프티아를 다스리는 펠레우스 왕의 아들인 아킬레우스를 보자마자 그의 매력에 사로잡힌다. 아킬레우스 역시 파트로클로스를 다정하게 대하지만,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이자 여신인 테티스는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둘만의 사랑을 키우는 한편, 각각 왕국의 후계자이자 후계자를 보필하는 파트너로서 문무를 열심히 가다듬는다.


신분의 차이, 어머니의 반대, 전쟁 발발, 죽음을 예고하는 신탁...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 사이를 갈라놓을 만한 위기가 여러 번 발생하지만 그때마다 두 사람은 슬기롭게 극복하고 더욱 단단하게 맺어진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선 동성애가 불법도 아니고 금기도 아니었지만, 두 사람을 지켜보는 눈이 항상 고운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자유롭게 한 방을 쓰고 한 침대를 쓰고 동침을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BL 소설에 나올 법한 달콤한 대사와 후끈한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19금 소설이 아닌 만큼 수위가 그리 높진 않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가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로맨틱한 장면도 좋았지만, 나는 이들이 당대의 풍습과 사회의 모순에 맞서는 모습이 특히 좋았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는 남자든 여자든, 귀족이든 노예든 난잡하게 사귀고 몸을 섞는 궁궐 내에서 서로에 대한 신의를 지키려 노력한다.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거나 살상을 함부로 하지도 않고, 억지로 전쟁터에 나가서는 성노예로 잡혀온 여성들을 구해준다. 우리가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 참다운 '영웅'이란 사실 이런 이들이 아닐까. 이 소설과 비슷한 분위기, 비슷한 메시지를 지닌 '고전의 재해석'이라면 얼마든지 더 읽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