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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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 일본에 갔을 때, 한국 정부와 재일 조선인을 비방하는 말을 확성기에 대고 외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눈에 띄는 흰 차에 타고 있었고, 내 곁에 있던 일본인들은 물론 경찰도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쉬지 않고 확성기에 대고 떠드는 그들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무기를 들고 있을지도 모르니 함부로 덤비는 게 위험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나 역시 한국인인 걸 들키면 그들에게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잠자코 있었으니 변명할 자격이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며칠 전 거리를 걷다가 박근혜 정부의 무죄를 호소하고 현 정부를 막무가내로 비방하는 차(이 차도 흰 차였다)를 봤을 때 기시감을 느낀 것으로 모자라 소름이 돋은 건 왜일까. 


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처음 펼쳐들었을 때, 나는 이 책이 일본을 찬양하는 책인 줄 알았다. 마츠오 바쇼의 유명한 기행문 <오쿠노호소미치(奥の細道)>에서 제목을 딴 것이며, 각 장의 제목이 바쇼, 잇사 같은 일본의 이름난 하이쿠 시인들의 시에서 유래한 것이며, 일본을 연상케하는 요소가 하도 많아서 그랬다. 1914년이나 1915년에 오스트레일리아 테즈메이니아에서 태어난 도리고 에번스가 순조롭게 의대에 진학하고 명망 있는 가문의 여자와 결혼해 승승장구하는 대목까지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내를 배신하고 불륜에 빠져 있던 도리고가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고 포로로 잡혀 버마에서 인도로 연결되는 철도를 건설하는 노동에 투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이후 소설은 한국 영화 <군함도>를 연상케하는 참상이 벌어진다. 일본인이 조선인, 중국인은 물론이고 동남아시아 사람들도 전쟁에 끌고가고 징용에 투입하고 성노예로 착취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도 피해자인 줄은 몰랐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인에 눈에 비친 일본 군인은 일본이 아시아 전체를 서양 세력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킬 구세주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그들이 따르는 천황 폐하의 거룩한 뜻을 이뤄야겠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전쟁 기계, 전쟁 로봇과 다름이 없었다. 이들은 사람을 착취하고 학대하기를 두려움 없이 하며,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파묻는 일에도 전혀 양심의 거리낌이 없었다. 


여기까지는 한국인들이 줄기차게 읽어온 민족 문학, 그 중에서도 식민지 시대의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문학 작품들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수많은 경험자들이 증언하고 기록과 증거가 뒷받침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리처드 플래너건 역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포로로 잡혀서 강제 노동에 투입된 적이 있는 자신의 아버지의 실제 경험으로부터 이 소설을 착안했다. 


작가는 과거를 기록하고 만행을 고발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얼룩진 과거를 사람들이 어떻게 기억하는지 또는 기억하려 하지 않는지에 주목한다. 도리고는 훈련받은 의사이지만 사람들을 살리지 못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힘 없이 바라보아야 했고, 애써 살려놓은 사람이 죽어가는 걸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에 머리 숙일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살기 위해서는 그들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명령에 따라 포로들을 통솔하는 리더로 일해야 했다. 어쩔 수 없었다고 그 때나 지금이나 위로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걸까. 다른 방법이 있었는데 비겁하게 피한 건 아닐까. 도리고는 포로 신세에서 풀려나 편안한 생활을 되찾은 후에도 그 때의 기억 때문에 괴로워 한다. 


세월이 흘러 전쟁 영웅으로 추대된 도리고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하고 죄스럽다. 자신이 살리지 못한 사람들이 떠올라서, 죽도록 내버려둔 시체들이 생각나서 잠도 제대로 못 잔다. 반면, 도리고를 비롯해 포로들을 악랄하게 괴롭혔던 일본 군인들은 일본에 귀국한 후 과거의 행적을 숨기고 잘만 살아간다. 과거를 반성하고 죗값을 치르겠다고 나서는 일본인을 바보 취급하고, 그들을 밟고 올라서서 더 큰 부귀영화를 누린다. 전쟁을 겪지 않고 과거를 모르고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일본인들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날조된 역사와 편향된 기록을 진실로 믿고, 그들의 귀에 들리는 잘못된 선동에 점점 익숙해진다. 


"어머니, 그들은 시를 써요." - 파울 첼란 


소설에 묘사된 일본 군인들은 폭력과 야만으로 점철된 인간들이 아니다. 그들은 시를 쓰고 시를 지으며 시를 주고받는 놀이도 즐긴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학살했던 나치 군인들이 가정에서는 더없이 친절한 남편이었다는 기록을 떠올렸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 당시 새파란 젊은이들을 가혹하게 고문한 고문 기술자들이 고문실 밖에선 가족들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는 자상한 아버지들이었다는 얘길 떠올렸다. 겉으로는 예술을 논하고 이상을 노래하던 사람들이 오랜 세월 젊은이들을 착취하고 여성들을 괴롭혔다는 고발을 떠올렸다. 


이런 이야기들도 한때는 무시되고 없던 일 취급 당했다. 지금은 전 세계인이 다 아는 독일 나치의 만행도 한때는 유대인들이 꾸며낸 음모라는 소문이 돌았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종북 세력으로 몰렸다. 갑질, 성추행을 고발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프로 불편러, 내부 고발자로 찍혀서 조직 또는 집단 내에서 괴롭힘 당하고 쫓겨나는 일이 다반사다. 이런 이야기를 더 많이 알리고 진실을 밝히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과거를 이야기하고 역사를 만드는 데 동참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를 왜곡하고 잘못을 미화하는 사람들에게 발언권이 돌아가고 그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반영된다. 과거를 이야기하는 일은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을 끌어안고만 있는 사람들에게도 위안이 되고 용기를 준다. 도리고처럼 자신이 살린 사람들의 숫자보다 살리지 못한 사람들의 숫자를 헤아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안식을 준다. 


책장을 덮으면서 한국 정부와 재일 조선인을 비방하는 소리를 매일 들으며 견뎌야 하는 일본 내 한국인과 재일 동포들을 생각했다. 돈과 권력을 믿고 법을 무시하고 국민들을 우롱하고도 뻔뻔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빼앗긴 평화를 되찾고 정의를 바로잡는 길은 멀고도 좁은 길일 터. 지금은 비록 멀고 좁게만 보여도 함께 가면 더 멀리 갈 수 있고 결국엔 끝이 있다는 진리를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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