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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디아스포라 기행>은 재일조선인 학자이자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시각을 반영한 글을 쓰는 작가 서경식이 런던, 광주, 카셀, 브뤼셀, 잘츠부르크 등을 여행하며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기록한 에세이집이다.
저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 슬하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온갖 차별과 멸시를 당하며 성장했다. 군부 독재 시절 두 형 서승, 서준식이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각각 19년, 17년의 옥고를 치르게 되어 저자 또한 엄혹한 나날을 보냈다. 일본에선 한국 국적자라는 이유로 취직에 계속 실패했고, 한국에선 재일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두 형을 자유롭게 면회하지 못했다.
부모님마저 연달아 돌아가시는 바람에 망연자실해 있던 서른두 살의 어느 날, 저자는 도망치듯 해외여행을 감행했다. 전부터 해외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재일 조선인 2세라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외국에서 사고라도 당하면 한국과 일본, 어느 나라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 한국 여권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일본에 재입국할 때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겪지 않을까.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이러한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과 일본 양국의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지만 어느 한 나라에 온전히 소속되지는 못하는 디아스포라의 설움을 절절히 소개할 뿐 아니라 하나의 국적과 하나의 민족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수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디아스포라의 눈에 비친 세상의 풍경을 포착해 소개한다. 영국에선 고국인 독일에서 추방되었고 이제는 사상계에서도 추방될 위기에 놓인 마르크스의 묘비를 찾고, 이탈리아 토리노에선 아우슈비츠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 프리모 레비를 떠올린다.
작품의 역사적 배경이나 작가의 경력에 대해 알기 전부터, 폭력의 기억이, 그 냄새며 감촉과 함께 딱히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싫은 느낌'이 되어 보는 자에게 전해져온다. 그것이 이 작품이 예술로서 걸작인 이유다. 이 큐레이터에게는 그 '느낌'이 전해져 오지 않는 모양이다. 이런 감성의 단절에 할 말을 잃을 뿐이다.
여기에 일본 사회 자체의 문제가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장 가까이 있는 디아스포라인 재일조선인의 존재를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디아스포라 예술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162쪽)
저자는 전공인 문학뿐 아니라 음악과 미술에도 조예가 깊다. 저자는 독일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회에 참석했다가 혼란에 빠진다. 히틀러가 바그너를 편애했고 바그너 또한 히틀러에게 적극적으로 부역했다는 사실 때문에 바그너를 멀리했으나, 막상 직접 연주를 들어보니 바그너의 음악이 예상외로 마음에 와닿아서 이 마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고민한다.
광주에선 광주 비엔날레에 출전한 민중 미술 화가들과 재일 조선인 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며 이러한 작품을 볼 때 일반인의 시각과 디아스포라의 시각이 어떻게 다른지도 설명한다. 인도계이지만 우간다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아티스트 자리나 빔지의 작품에 얽힌 에피소드도 나온다.
저자는 2002년 일본에서 열린 한 심포지엄에 참석했다가 한 큐레이터가 빔지의 작품에 대해 '그의 작품은 설명을 읽지 않으면 관객에게는 아름다운 열대 풍경으로만 보일 뿐이다'라는 요지의 발언한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디아스포라인 저자는 빔지의 작품을 보는 순간 디아스포라의 고통과 애환을 절절히 느꼈지만, 디아스포라가 아닌 큐레이터에게는 그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자는 이것이 다수자와 소수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권력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차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 작품은 물론 디아스포라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디아스포라가 아닌 사람들, 즉 하나의 민족적, 국가적 배경만을 지닌 사람들이 무지하고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을 촉구한다. 벌써 십여 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지금 읽어도 책의 의미와 가치에는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