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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평점 :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가즈오 이시구로가 2000년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성인이 된 주인공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이 2005년에 출간된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 <나를 보내지 마>와 유사하다.
주인공은 영국의 상류층 청년이자 유능한 사립 탐정인 크리스토퍼. 풀지 못한 사건이 없는 크리스토퍼가 풀지 못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어린 시절 상하이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달아 실종된 사건이다. 크리스토퍼는 1900년대 초 상하이 주재 영국 기업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와 함께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의 외국인 공동 구역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외아들이지만 부모님의 지인인 필립 삼촌과 이웃에 사는 일본인 소년 아키라 덕분에 외롭지 않은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크리스토퍼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회사 직원과 크게 싸우는 장면을 목격한다. 크리스토퍼는 어머니가 중국 내에서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아편 반대 캠페인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와 관련된 일이라고 짐작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한다. 그런데 크리스토퍼가 열 살이 되던 어느 날, 아버지가 실종되고 어머니까지 연이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졸지에 고아가 된 크리스토퍼는 필립 삼촌의 주선으로 영국에 사는 이모 손에 거둬지고, 그곳에서 영국의 상류층 청년으로 자란다.
탐정이 되어 상하이를 다시 찾은 크리스토퍼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자신의 기억이 완벽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어린 시절 자신이 목격한 어머니의 싸움 상대는 아버지의 회사 직원이 아니라 아버지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신이 반대하는) 중국 내 아편 확산에 일조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큰 충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아버지와 오랫동안 불화 상태였다. 크리스토퍼는 오랫동안 자신을 돌봐준 필립 삼촌과 이모의 실체도 알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누린 부와 명예는 거대한 악과 그것을 은폐하기 위한 노력의 부산물임을 알고 당혹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어린 시절 크리스토퍼와 아키라가 함께 놀았던 추억을 회상하는 대목이다. 크리스토퍼는 아키라의 소년다운 과장이나 허풍을 꿰뚫어 보면서도 아키라의 말을 쉽게 거스르지 못한다. 아키라와 함께 있을 때는 그를 미워하거나 질투하기도 하지만 막상 아키라가 곁을 떠나면 그를 몹시 그리워하는 애증의 감정을 품는다. 1인칭 관찰자 크리스토퍼와 그의 절친이자 트러블 메이커인 아키라의 관계는 <나를 보내지 마>의 주인공 캐시와 루스의 관계를 닮았다.
어른이 되어 상하이를 다시 찾은 크리스토퍼는 아키라를 우연히 만난다. 옛 친구와 재회해 감격에 찬 크리스토퍼에게 아키라는 엄혹한 현실을 일깨워준다. 나는 일본인. 너는 영국인. 전쟁이 한창인 지금 너와 나는 만나서도 안 되고 말을 섞어서도 안 되는 사이라고. 크리스토퍼는 옛 추억을 찾아 고향에 돌아왔지만, 추억 대부분이 잘못된 추억이거나 심하게 변했거나 영영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알고 허망해 한다. 옛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랄까. 진실을 깨닫고 허탈해 하던 크리스토퍼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