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아 있는 나날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남아 있는 나날>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1989년에 발표한 세 번째 장편 소설이자 부커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작품이다(세 번째 소설로 부커상을 받다니 흠좀무...). 첫 번째 장편 소설 <창백한 언덕 풍경>과 두 번째 장편 소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가 일본계 작가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낸 작품인 반면, <남아 있는 나날>은 작가 이름을 가리면 일본계 작가가 쓴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기가 어렵다. 그만큼 영국적인 정서가 강하며 인류 보편적인 메시지가 담긴 작품이다.
주인공은 평생을 영국 귀족의 집사로만 살아온 '스티븐스'라는 노인이다. 집안 대대로 집사인 스티븐스는 어려서부터 훌륭한 집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고, 교육받은 대로 훌륭한 집사로서 살았다. 현재는 저택의 새 주인인 미국인 갑부의 집사인데, 어느 날 주인이 쓸 만한 하녀를 구해달라고 부탁하고 스티븐스가 한때 이 저택에서 일했던 켄턴 양을 떠올리고 켄턴 양을 찾아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설 초반은 스티븐스와 켄턴 양이 한때 연애 감정을 품었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데에 주력한다. 아버지가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일에만 정신을 쏟을 만큼 일 중독자인 스티븐스는 감정이 풍부하고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켄턴 양과 시도 때도 없이 부딪쳤다. 얼마 후 켄턴 양은 스티븐스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임을 깨닫고, 스티븐스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이길 바랐다. 하지만 스티븐스는 자신의 감정을 깨닫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숨기는 것인지, 켄턴 양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결국 켄턴 양은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고 저택을 떠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소설은 과거에 놓친 사랑과 그에 대한 회한을 다룬 전형적인 연애소설로 보인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니다. 스티븐스와 켄턴 양이 부딪친 몇 가지 사건 중에 스티븐스가 주인의 지시로 하녀 두 명을 내쫓은 사건이 있다. 당시 저택의 주인이었던 달링턴 경은 영국인이면서 나치 지지자로, 나치의 선동에 찬성한 나머지 유대인 하녀 둘을 독일로 되돌려 보내라고 지시했다. 주인이 지시하는 사항은 뭐든 수행해야 한다고 믿는 데다가 사적으로도 달링턴 경을 존경했던 스티븐스는 이 지시를 한 점의 의심 없이 수행했고, 켄턴 양은 이런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스티븐스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첫 번째 장편 소설 <창백한 언덕 풍경>에 나오는 '오가타'와 두 번째 장편 소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 나오는 '마스지 오노'를 빼닮았다. 이들은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의 평범성',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초인에 대비되는 '말인(末人)'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선량하고 성실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사람들이다. 주체적으로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에 악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직접 악을 수행하는 역할을 떠맡는 사람들이다.
전쟁이 끝나고 시대가 바뀐 후에도 스티븐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난 그저 주인의 지시를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 주인이었던 달링턴 경을 여전히 존경한다. 켄턴 양이 자신을 떠난 이유, 즉 두 사람이 궁극적으로 맞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스티븐스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애잔한 눈으로 되짚어보며 저택으로 돌아간다. 그의 기억 속에서 나치 부역자였던 달링턴 경은 영원히 존경스러운 주인님, 나치 부역자의 부역자였던 자신은 훌륭한 집사, 자신의 실체를 꿰뚫어본 켄턴 양은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사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