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한구석에 - 상
코노 후미요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너의 이름은.>을 꺾고 제40회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애니메이션 작품상을 수상한 바로 그 영화! 제41회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심사위원 특별상, 2017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국제경쟁장편 대상,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와 키네마 준보상에서도 각각 우수작품상, 우수음악상, 감독상을 수상한 영화 <이 세상의 한구석에>의 국내 개봉에 맞춰 코우노 후미요의 원작 만화 <이 세상의 한구석에>가 정식 출간되었다.





총 3부로 구성된 만화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예술 작품을 방불케 하는 아름다운 그림과 기발한 구성이 눈길을 사로잡고, 애니메이션보다 반전(反戰)을 향한 작가의 메시지가 더욱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올해 초 일본에 갔을 때 영화 <이 세상의 한구석에>를 홍보하는 포스터를 많이 봤는데 드디어 국내에 개봉되는구나. 일본 관객 동원수 200만 명을 돌파했다기에 어떤 작품일까 궁금했는데 만화를 읽어보니 과연 많은 관객이 볼 만한 작품이다.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시대의 히로시마. 주인공 '스즈'는 학교가 파하면 김 공장에서 일하는 부모님을 돕고, 무서운 오빠와 귀여운 여동생의 손을 잡고 심부름을 다니는 착한 소녀다. 마음씨는 착하지만 약은 구석이 없고 멍하게 있다가 실수를 저지르기 일쑤인 스즈의 특기는 그림 그리기. 흰 종이만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전쟁 중이라 물자가 부족한 관계로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연필이나 목탄이 넉넉지 않은 게 늘 아쉽다.





그러던 어느 날 스즈에게 선 자리가 들어온다. 부모가 정한 상대라면 무조건 결혼해야 했던 시대. 스즈는 아직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고 결혼할 마음은 더더욱 없지만, 시집이라도 가서 가난한 살림에 입 하나 덜어주는 게 효도라고 여기고 순순히 선 자리를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스즈가 정든 고향인 히로시마를 떠나 낯선 쿠레에서 시부모님, 시댁 식구들을 모시고 살아가는 이야기가 이 만화의 큰 줄거리다.





스즈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어머니 어깨너머로 배운 살림과 그림 그리기뿐. 그래서 실수도 많이 하고 멍하니 있지 말라는 꾸지람도 듣지만, 시댁 식구들은 점점 스즈에게 마음을 열고 스즈 또한 시집살이에 적응한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배급받는 물자도 줄고, 암시장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멀쩡하던 집을 비우고 소개하라는 명령이 내려오는 등 상황은 점점 나빠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즈와 가족들은 웃음을 잃지 않고 명랑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처음엔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던 남편과의 관계도 점점 좋아진다. 스즈는 양쪽 부모가 두 사람을 중매해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두 사람은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다(나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둘의 인연을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남편을 믿고 따르지만 자신의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했던 스즈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남편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남편 역시 스즈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 또한 감동적이다.





원작자 코우노 후미요는 스즈와 같은 히로시마 출신이다. 작가는 이 작품 전에도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만화 <저녁뜸의 거리>, <벚꽃의 나라> 2부작을 그린 적이 있다.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작가의 외할머니를 모델로 그린 만화로, 외할머니가 실제로 체험했음직한 당시 사정을 치밀하게 조사해 작품에 반영했다. 영양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서 생리가 끊기고 아이가 들어서지 않는 등 당대 여성들이 처했던 상황에 대해서도 자세히 묘사된다. 가난한 집에서 딸이 태어나면 유곽에 팔고, 대를 이을 아들만 거두고 딸은 내쫓는 등의 여성차별도 생생하게 나온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일본이 배경인 만화 중에는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비난을 받는 작품이 더러 있다. 이 작품 또한 전쟁 당시 일본이 한국을 비롯한 식민지에서 저지른 범죄와 식민지 국가의 훨씬 처참했던 상황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그래도 일본인은 모국어를 빼앗기거나, 창씨개명을 강요당하거나, 강제 징병 또는 징용을 당하거나, 정신대에서 일할 노동자를 고용한다는 미명 아래 수많은 여성을 위안부로 끌고 가는 일을 당하지는 않았다는 말을 들을 법하다.





하지만 <이 세상의 한구석에>를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말로 일축하는 건 여러모로 아까운 일이다. 어쩌다 보니 전쟁 중인 나라에서 태어난 소녀가 원폭 투하로 가족을 잃고, 순간의 실수로 죄 없는 아이를 죽게 하고, 자신 또한 좋아하는 그림을 평생 그릴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부상을 입는 장면에선 나 역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피해국 일본'만 부각하지 않고 '가해국 일본'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왕의 항복 선언을 들은 직후 스즈는 쿠레 시내로 뛰쳐나가 거리에 내걸린 태극기를 바라보며 폭력으로 사람들을 복종시킨 나라는 폭력으로 망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게 이 나라의 '정체'라면 차라리 모르는 채로 죽는 편이 나았을 거라는 - 일본인이 듣기에는 다소 과격하게 들릴 수 있는 대사를 읊조린다(과연 일본인에게는 불편했는지 애니메이션에서는 삭제되었다고).





요즘처럼 일본이 우경화되고 평화 헌법을 개정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며 전쟁의 위험성을 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추세 속에서 <이 세상의 한구석에>처럼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작품이 있고, 원작을 재구성한 영화가 200만 명 이상의 관객 동원을 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한 일이다. 애니메이션에는 생략된 부분이 적지 않다고 하니 작품의 진가를 알고 싶다면 원작 만화를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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