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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언덕 풍경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요즘 나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을 부지런히 사들이고 있다. 안 그래도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전체를 차분히 읽어보고 싶었는데, 가즈오 이시구로가 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인터넷 서점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을 일정 금액 이상 구입하면 선물을 얹어주는 이벤트를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즈오 이시구로 관련 기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고, 즐겨 듣는 독서 팟캐스트마다 가즈오 이시구로 특집을 하니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을 읽기에 지금보다 더 좋은 때가 없다.
가즈오 이시구로 관련 팟캐스트로는 '교보문고 낭만서점 특별편 -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는 누구인가'를 추천한다(클릭). 나는 이 방송을 듣고 가즈오 이시구로가 비교적 긴 경력에 비해 적은 수의 작품을 발표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으며 일관된 문제의식을 견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송에 출연한 문학 평론가 박혜진이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은 초기작부터 순서대로 읽으면 좋다고 하여 데뷔작 <창백한 언덕 풍경>부터 읽기 시작했다.
<창백한 언덕 풍경>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1982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주인공 에츠코는 영국에 홀로 사는 중년의 일본 여성이다. 에츠코는 두 번 결혼해 두 딸을 얻었다.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딸 게이코는 얼마 전 자살했고,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딸 니키는 도시에서 살다가 잠시 에츠코의 집에 머물고 있다. 소설은 에츠코가 오랜만에 집에 온 니키와 함께 생활하면서 게이코를 임신했을 때 만났던 사치코와 마리코 모녀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에츠코가 게이코를 임신했을 때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복구가 한창이었다. 에츠코는 원자폭탄이 떨어져 폐허가 된 나가사키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남자와 결혼해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에츠코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건너편의 오두막에 사는 사치코와 마리코 모녀를 알게 된다. 사치코는 에츠코에게 미국 군인과 사귀고 있으며 조만간 미국 군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살 생각이라고 고백한다. 에츠코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지만 내심 사치코가 헛된 꿈에 부풀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에츠코의 시아버지 오가타다. 전직 교장 선생님인 오가타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엘리트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오가타는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패한 후에도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기보다는 변명하고 합리화하기에 급급하다. 오가타는 아들 지로와 며느리 에츠코를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멋대로 조종할 수 있는 장기짝처럼 여긴다. 개인은 국가의 부속품이며,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라고 굳게 믿는다. 자기 의견은 분명히 밝히면서도, 타인이 자기 의견을 분명히 밝히는 건 참지 못한다. 특히 아래 세대가 윗세대인 자신들을 비난하는 걸 참지 못한다.
우리는 세대에서 세대로 적절한 자질이 계승되도록 헌신했어. 아이들이 조국에 대해, 민족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고 성장하도록 말이다. 한때 일본에는 정신이 있었고, 그것이 우리 모두를 묶어 주었지. 오늘날 어린아이들이 어떤지 생각해 보렴. 학교에서 배우는 거라곤 살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요구해야 한다는 이기적인 사고 외에는 하나도 없어. 그리고 집에 가면 어머니가 아버지가 지지하는 정당에 투표하기를 거부해 서로 싸우고 있는 부모를 보는 거야. 그게 지금 우리의 상황이란다. (87쪽)
에츠코의 회상 속에서 에츠코는 시종일관 남편과 시아버지에게 헌신하고 이웃인 사치코와 마리코 모녀를 불평 없이 돌본다. 하지만 결국 에츠코는 남편과 이혼하고 (훗날 태어나는) 게이코와 함께 일본 땅을 떠난다. 에츠코가 내심 못마땅하게 여겼던 사치코와 마리코 모녀처럼 말이다. 작가는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패전 후 일본 사회에 남아 있던 크고 작은 병폐를 드러내고,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을 조명한다. 35년 전에 발표된 작품임에도 문장이 비교적 읽기 쉽고, 문제의식 또한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있어 읽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