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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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는 '일본의 카프카'로 불리는 아베 코보가 1962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어느 여름날, 한 남자가 해변 마을을 찾아온다. 남자의 이름은 니키 준페이. 도시에서 교사로 일하는 그는 휴일이 되면 취미인 곤충 채집을 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누빈다. 이 날도 언제나처럼 휴일을 맞아 모래땅에 사는 곤충을 채집하러 이 마을에 왔다. 희귀한 곤충을 찾아 헤매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그의 눈앞에 기이한 풍경이 펼쳐진다. 해변의 모래 언덕을 따라서 기이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모래 언덕에는 부서져 가는 벌집처럼 지하로 20미터 가까이 깊게 팬 모래 구덩이가 있고, 구덩이 안에는 다 쓰러져가는 집들이 있었다. 남자는 마을 사람들의 계략에 빠져 모래 구덩이 속으로 내려가게 되고, 그날부터 모래 구덩이 속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밥을 먹을 때는 모래가 입안에 들어와 씹히지, 잘 때는 들숨과 함께 입과 콧속으로 모래가 들어오지, 모래가 무너져 집이 파묻히지 않도록 흘러내리는 모래를 계속 삽질해서 퍼내야 하지... 정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물론 남자는 저항한다. 삽질을 거부하기도 하고, 자신을 구덩이 안으로 밀어 넣은 마을 사람들을 소리 내어 부르기도 하고, 구덩이 안에서 만난 여자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고 항변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여자가 하는 말. "정말이지, 끔찍하도록 걸었어요...... 이곳에 올 때까지...... 애를 안고, 오래오래...... 이제, 걷는 데는 지쳤어요." 이미 여러 해를 구덩이 안에서 살아온 여자는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덩이 밖으로 나가면 살 방법이 없다고, 구덩이 안에서 매일 같이 흘러내리는 모래를 퍼나르는 삶이 훨씬 낫다고 확신한다. 


십몇 년 전, 저 폐허의 시절에는 모두들 한결같이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찾아 광분하였다. 그렇다고 지금,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에 식상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실제로 너 역시 그런 환상을 상대로 한 귀신놀이에 지친 나머지 이런 사구를 찾아오지 않았던가. (중략) 아무리 소풍을 동경하는 어린애라도 미아가 된 순간에는 엉엉 우는 법이다. (87~8쪽) 


이후에도 남자는 여러 차례 구덩이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한다. 그리고 마침내 구덩이에서 빠져나갈 절호의 기회가 왔을 때, 남자는 이제까지 했던 발언이나 행동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구덩이 밖으로 나가기가 무서워진 것일까. 구덩이 밖으로 나가봤자 별것 없음을 깨달은 것일까.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망한 삶, 구덩이 안에 있으면 구덩이 탓이라도 하지만 구덩이 밖으로 나가면 구덩이 탓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드라마 <미생>에 나온 "회사가 전쟁터면 밖은 지옥이다."라는 대사가 떠오른다. 남자는 구덩이 안이 전쟁터면 구덩이 밖은 지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지옥에서 예측불허의 삶을 다시 시작하느니, 전쟁터에서 배급되는 밥을 먹고 밤마다 여자를 끌어안으며 모래나 퍼나르는 삶을 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전쟁터? 지옥? 구덩이 안? 구덩이 밖?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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