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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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독일 소년 페터 데바우어는 여름방학마다 혼자서 스위스에 있는 할아버지 댁으로 간다. 할아버지는 은퇴 후 할머니와 함께 '기쁨과 재미를 주는 소설 총서'를 편집하는 일을 하는데, 페터가 집으로 돌아갈 무렵이 되면 공부할 때 연습장으로 쓰라고 남은 원고 뭉치를 준다. 


언젠가 페터는 할아버지가 준 원고 뭉치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이야기를 발견한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에 나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온 독일 병사 카를의 이야기다. 페터는 왠지 모르게 이 이야기에 마음이 끌려서 할아버지에게 뒷이야기를 읽게 해달라고 조를 생각이었지만, 얼마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뒷이야기를 읽을 수 없게 된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페터는 법학자의 꿈을 접고 출판사에서 법학 전문 편집자로 일한다. 일하는 틈틈이 독일 병사 카를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는지 수소문하던 페터의 책상 위에 어느 날 원고 한 부가 놓인다. 원고를 쓴 사람은 미국의 법학 교수 존 드 바우어. 이름을 본 순간 그가 자신의 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직감한 페터는 곧바로 짐을 꾸려 미국으로 향한다. 과연 그는 페터의 아버지일까. 어떤 사연이 있어 아들까지 버리고 정체를 숨긴 채 사는 걸까.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2006년에 발표한 소설 <귀향>은 그가 직전에 출간한 <책 읽어주는 남자>와 여러모로 닮았다. 주인공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년 시절에 평생 잊지 못할 강렬한 경험을 한다. 그 후 세상사에 젖어 살다가 뜻밖의 공간에서 평생 찾았던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그 사람은 주인공이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다르다. 이러한 줄거리를 비롯해 헌법재판소 판사 출신답게 작품 곳곳에 법학 관련 내용이 등장하고, 나치 전범 처리와 전후 세대의 역사 인식 문제 등을 적극적으로 거론하는 것도 비슷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귀향>은 <책 읽어주는 남자>와 달리 고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귀향>에서 주요 모티프로 등장하는 고전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10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아내 페넬로페가 구혼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남편이 봐서 결코 유쾌할 리 없는 광경을 목격한다. <귀향>에서도 몇십 년 만에 아버지를 찾아간 페터가 알게 되는 아버지의 진실은 아들이 알아서 결코 유쾌할 리 없는 내용이다. 


오디세우스가 구혼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페넬로페를 되찾는 것과 달리, 페터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극적인 부자 상봉을 하는 대신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서둘러 독일로 돌아간다. 페터가 죽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호기심이나 동경 따위의 허상. 페터는 그것들을 죽인 다음에야 소년 시절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오랫동안 그를 괴롭힌 문제에서 벗어나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된다.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멋들어진 말이나 가공된 이미지 말고, 추악한 진실과 약자들의 분노를 마주하고 그것들을 인정할 때, 비로소 그 공동체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되고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좋은 메시지를 담은 책이 하필 이 출판사에서 나오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있나. 기분이 개운치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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