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독서 - 완벽히 홀로 서는 시간
김진애 지음 / 다산북스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진애 하면 요즘은 '김어준의 뉴스공장'의 목요일 코너지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내게는 팟캐스트 '책으로 트다'의 진행자 김진애의 기억이 더 강렬하다. '책으로 트다'는 격주로 출연하는 게스트의 면면이 대단했다. 유시민, 강신주, 김탁환, 표창원, 서천석 등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분들이 게스트로 나와서는 온갖 책 이야기를 했다. 그걸 또 다 받아치는 김진애의 내공이란! 어떤 분야든, 어떤 책 이야기가 나오든 막힘없이 받아치는 김진애의 모습을 보면서 대체 책을 얼마나 많이, 깊이 읽었을까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진애가 독서에 관한 책을 쓴다면 반드시 읽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몇 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나왔다. 김진애의 독서 내공을 담은 책이. 제목은 <여자의 독서>. 이 책은 저자 김진애가 그동안 읽은 수많은 책 중에서 유난히 자신을 흔들고 매혹시킨 여성 작가들의 책만을 엄선해 소개하는 책이다. 저자는 물론 여성 작가의 책만을 가려 읽지는 않는다. 남성 작가의 책을 멀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여성으로 살면서 여성의 현실과 이상, 여성의 심리와 행동, 여성의 상처와 고통을 다룬 책을 찾다 보니 자연히 여성 작가의 책을 읽게 되었고, 여성 작가의 책 속에서 의문에 대한 답을 얻고 상처를 치유하고, 여성 작가의 작업을 보며 자신도 그러한 작업을 해야겠다는 자극을 받았다. 


사춘기 시절에 내가 직면했던 자존감의 구체적 이슈는 '여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내가 바라볼 실제 여자'가 없다는 사실이 큰 영향을 미쳤다. 위인들의 이야기와 역사 속의 인물들이나 정숙한 여인형이나 대의를 위해 산화한 순국열사형 인물들에게 생생하게 공감하기란 참 어렵지 않은가? (35쪽) 


저자는 어려서부터 책을 즐겨 읽는 책벌레였다. 1남 6녀 딸부잣집의 둘째 딸. 맨 위 오빠는 아들이라서, 바로 위 언니는 예뻐서 어른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니 자신은 책이라도 열심히 읽어 똑똑함을 뽐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책이 더 넓은 인생의 문을 열어줄 줄이야. 저자는 어려서 순전히 호기심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 <삼국지>, <논어>를 열독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학문의 기초를 다졌고, 대학 시절에는 박경리의 <토지>, 미국 유학 시절에는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읽으며 건축과 정치라는 일생의 화두를 얻었다. 


박경리와의 만남은 '일대 사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특별하다. 저자는 오랫동안 박경리가 남성 작가인 줄 알았다. 당시만 해도 작가의 사진이 책에 담기지 않았고, 박경리라는 이름은 저자가 느끼기에 남자 같았다. 우연히 박경리가 여성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 저자는 드디어 '처음으로 흔쾌히 좋아하고 존경할 수 있는 여성 인물'을 만났다는 생각에 흥분했다. 박경리의 작품 속에서 여성의 문제의식을 발견하고 전율했다. '여성이라면 어떤 소재, 어떤 주제, 어떤 문체일 것이라는 편견'으로부터도 벗어났다. 박경리의 작품 중에서도 <토지>는 저자로 하여금 우리 땅과 전통 건축의 의미에 눈을 뜨게 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여자에게 가해지는 암묵적인 금기들이 많지만 그중 딱 두 가지만 이야기한다면, '정치와 섹스'를 들 수 있다. 적어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모르는 척, 없는 척, 수줍은 척' 하라는 것이다. (중략) (여자들은) 정치에 대해 모르는 척하고 관심 없기를 요구받다 보니 '권력 게임의 역학'에 대해 무지하게 키워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떤 계기가 생기면 '올바름이 무엇이냐?'에 대한 의식이 커지며 훨씬 더 치열하게 정의를 추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152~3쪽) 


이 책은 여성 작가의 책을 엄선해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책을 매개로 다양한 화제를 제시한다. 여성의 멘토, 여성의 성장, 여성의 정치와 섹스, 여성의 연대, 여성 인간의 확장, 센 언니의 탄생, 여자를 지키는 수호신, 여성성과 남성성 등. 이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대목 중 하나가 정치와 섹스에 관한 대목이다. 저자가 보기에 정치와 섹스는 서로 맞물려 있는 이슈다. 정치의 조건에 따라 섹스에 대한 사회의 태도가 매우 달라진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은 정치적으로나 성적으로나 우위에 있다. 그러다 보니 남성은 정치와 성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고 열려 있기를 강요받는다. 반대로 여성은 정치적, 성적으로 열위에 있다 보니 정치와 성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고 열려 있으면 외려 위험한 존재로 인식된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정숙하게 행동할 것을 강요받으며 자란 저자는 성을 책으로만 배우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야 성에 대해 자유로워졌다. 두 번째 임신 때 '보스턴여성건강서공동체'에서 만든 <우리 몸, 우리 자신>이라는 책을 읽은 것이다. 이 책에는 남녀의 성징, 월경, 성호르몬, 섹스와 관계, 피임, 임신 등은 물론 성 지향성과 젠더, 성적 감수성과 관계 감수성, 성폭력과 성 학대 등 한국에서는 아직 인식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나와 있다고 한다. 배우 줄리앤 무어가 '여성의 건강을 위한 최고의 책'이라고 예찬했다는데 대체 어떤 책일까. 한국에서도 출간되었는데 가격이 상당하다. 과연 사서 읽을 수 있을는지.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68495)


이 책에는 <자기만의 방>, <정희진처럼 읽기> 같은 페미니스트 필독서는 물론,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은 신화와 <작은 아씨들>, <빨강 머리 앤> 같은 고전 명작 소설, <나를 찾아줘>, <7년의 밤> 같은 현대 대중 소설, <침묵의 봄>, <희망의 밥상> 같은 논픽션 명작이 다채롭게 실려 있다. 오리아나 팔라치의 <한 남자>와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읽어보고 싶은데 책이 오래전에 나왔거나 나왔어도 절판된 듯해 아쉽다. 페미니즘 붐을 타고 다시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시작으로 더 많은 여성 작가의 책이 발굴되고 더 많은 여성 독자의 독서 체험담이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나라면 어떤 여성 작가를 소개할까. 김진애를 비롯해 미야베 미유키, 온다 리쿠, 황정은, 정이현, 정혜윤, 이다혜 등등... 언젠가 소개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