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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특별판, 양장)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요즘 연이어 터지는, 여고에서 일어난 남자 교사 성희롱, 성추행 고발을 보면서 나의 여고 시절을 떠올린다. 지역의 유일한 여고라서 '인형 공장'으로 불렸던 그곳. 몇 안 되는 남자 교사들은 은근슬쩍 학생들의 몸을 만지거나 누구는 가슴이 작니 크니, 누구는 엉덩이가 커서 나중에 애를 잘 낳을 것이라는 성희롱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반발하고 싶었지만, 성적을 잘 받기 위해, 문제아로 찍히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입 닫고 넘어갔다. 그때는 그 순간만 모면하면 될 줄 알았는데...
나이를 먹고 사회에 나와보니 그 시절에 겪은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침마다 시작되는 화장 지적, 옷차림 지적, 몸매 지적, 나이 지적. 젊을 때는 젊다는 이유로 지적질 당하고 나이 드니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지적질 당하는 게 일이다. 어디 사회에서만 그런가. 집에서도 언제 결혼해 애 낳을 거냐는 잔소리 잔소리... 나는 애를 낳기 위해 만들어진 출산 기계인가. 당신들의 종족을 번식하기 위한 수단인가. 애를 낳으면 더 낳으라고, 잘 키우라고 고나리질이 계속되겠지. 이러나저러나 고나리질 당하고 욕을 먹는 게 여자의 일생이라면, 그냥 내 멋대로 살련다(하지만 말이 쉽지, 내 멋대로 살기도 쉽지 않다).
아무튼 이런 꿀꿀한 기분으로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를 읽었다. 21세기 중반, 가부장제와 성경을 근본으로 한 전체주의 국가 '길리아드'가 탄생하고 국민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하기 시작하며 그중에서도 여성들은 나이 및 출산 능력에 따라 여러 계급으로 분류된다는 파격적인 설정인데, 무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인 1985년에 발표된 소설이란다. 최근에는 드라마로 제작되어 또다시 화제를 모으고 있다고(드라마 캡처 사진을 보았는데 소설 속 장면들을 비교적 충실히 재현했다).
주인공 오프브레드는 길리아드가 생기기 전까지 남성들과 어울려 교육도 받고 일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나 길리아드가 생기고 사회 체제가 바뀌면서 오프브레드는 이름과 가족을 빼앗긴 채 사령관의 '시녀'가 되어 그를 위해 살림을 하고 그의 아이를 수태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여자는 책을 읽을 수도 없고, 재산을 가질 수도 없고, 허락된 남자가 아니면 눈도 마주칠 수 없고, 여자끼리도 정해진 대화 이외엔 할 수 없는 세상.
최악은 가임기가 된 여성들이 강제로 차출되어 국가의 유력자들에게 배분되고 그들의 후손을 낳기 위한 재생산에 투입된다는 것인데, 너무 끔찍하지만, 초경만 시작해도 '너는 이제 여자다'라며 온갖 구속과 압박이 시작되고, 한쪽에선 저출산의 책임을 여성에게만 지우고 한쪽에선 독박 육아의 고통을 호소하는 모순이 존재하고, 국가가 나서서 가임기 지도를 만들고, 기껏 지하철에 임부석을 만들었더니 임부석에 앉는 여자가 정말 임신을 했는지 아닌지 확인을 해야 한다느니, 임부가 앉으면 어디 어르신이 서 있는데 젊은 여자가 앉아 있느냐고 발차기를 당하는 이 나라의 사정을 생각하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다 큰 성인의 용모를 검사하고, 스커트 길이를 제한하고, 스타킹 색깔까지 지정하는 나라. 여자한테만 '웃으라'고 강요하고 웃지 않으면 싸가지 없다, 그런 성격으로 시집 못 간다는 욕을 듣는 나라. 혼자 일하는 여자는 살인 표적이 되는 나라. 화장실에 갔다가 칼을 맞을 수도 있는 나라. 그래서 남녀 공용 화장실은 못 가고, 여성 전용 화장실은 여성 전용 화장실대로 몰카가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일을 보면서 얼굴을 가방으로 가리고 보이는 구멍마다 휴지를 끼워 막는 나라. 유력 정치인, 고위 공무원, 재벌 부회장이 아무렇지 않게 여성 비하 발언을 쏟아내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손해도 입지 않는 이 나라는, 적어도 여성들에겐, 이미 길리아드다.
읽기가 쉽지만은 않은 소설이고 약간의 아쉬움도 남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거나 적어도 이 소설의 존재 정도는 알았으면 좋겠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이 당하는 차별과 억압이 어떤 것인지, 여성이 느끼는 부담과 공포가 어느 정도인지 서로 이야기하고 알렸으면 좋겠다. 픽션도 좋고 논픽션도 좋고, 고발도 좋고 블로그나 트위터에 올리는 한 줄도 좋고. 그렇게 말하고 알리고 공론화해야 된다.
그리고 남자 교사의 성희롱, 성추행 실태를 고발한 여학생들, 정말 대단하고 존경하고 같은 여성으로서 먼저 소리 내지 못해 미안하다. 학생들을 보니 나 자신이 정말 부끄럽고 한심하다.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당하고 원망하고 혼자 열 냈다가 속으로 삭이는 것 말고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나 싶다. 미안하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