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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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를 때 내가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는 좋아하는 작가가 추천하는 책을 고르는 것이다.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을 읽은 것은 그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존경하는 작가, 박찬욱이 사랑하는 책이라는데 읽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읽어보니 과연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입을 모아 추천할 만하다. 눈에 비친 현실을 노골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세련된 태도, 허구를 그리면서도 진실을 놓치지 않는 통렬한 시선이 하루키와 박찬욱의 어딘가를 닮았다. 


<제5도살장>은 커트 보니것의 체험에 기반을 둔다. 코넬 대학교에서 생화학을 공부하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에 나갔다가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1945년 드레스덴 폭격을 겪었다. 주인공 빌리가 군인이 되어 유럽으로 가는 과정도 비슷하다. 검안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던 빌리는 전쟁에 나갔다가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드레스덴 폭격에 휘말리지만 고기 저장소에 피신해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커트 보니것이 전쟁이 끝나고 20년 넘게 지난 1969년에야 이 소설을 발표한 것처럼, 빌리의 이야기 역시 빌리가 아닌 소설 속 '나'가 쓴 책을 통해 전해진다. 


빌리는 전통적인 영웅 또는 주인공 상에 걸맞지 않다. 영웅이라기엔 겁이 많고 소심하고, 주인공이라기엔 현실을 타개할 힘도 의지도 없다. 그 대신 빌리는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과거, 현재, 미래를 정신없이 오가며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빌리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돌연 미래로 이동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을 만나기도 하고, 노인의 몸으로 뉴욕 거리를 거닐다가 갑자기 과거로 돌아가 드레스덴 폭격을 목도하기도 한다. 심지어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트랄파마도어 행성에 끌려가기도 한다. 이쯤 되면 전쟁 소설이 아니라 SF 판타지 소설로 분류해도 될 것 같다. 


일반적인 전쟁 소설과 달라도 너무 다른데도 전쟁의 비극은 외려 더 강하게 전해진다. 이는 빌리의 담담한 태도도 한몫한다. 유대인과 집시와 동성애자와 공산주의자의 지방을 녹여 만든 비누를 쓰면서도 '뭐 그런 거지'. 열네 살짜리 소년을 적으로 오인해 총살한 이야기를 듣고도 '뭐 그런 거지'. 드레스덴 폭격 당일 고기 저장소에 피신한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도 '뭐 그런 거지'. 이런 식으로 빌리가 참혹한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넘기는 것은 그가 무던한 성격의 소유자여서가 아니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참혹한 현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은 인간의 목숨만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도 앗아간다, 삶과 죽음의 경계 앞에선 영웅도 주인공도 없다, 오로지 '살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찬 연약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인간을 현혹하는 전쟁, 이런 인간을 전쟁터로 끌고 가는 국가야말로 경계의 대상이다,라고 대놓고 말하지 않는데도 정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점이 무라카미 하루키, 박찬욱 같은 작가, 예술가들을 매혹한 걸까. 이들이 커트 보니것에 반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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