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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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할 때 태아는 산모가 겪는 고통보다 수십 배는 더한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안전한 자궁을 벗어나 불안하고 수상한 세상으로 나온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지, 한때 태아였던 자로서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만약 태아에게 성인만큼 온전한 정신과 감각이 있어서, 자궁안에 있으면서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느끼거나 알 수 있다면 어떨까. 하필이면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란 게, 어머니와 삼촌이 불륜 관계이고 조만간 태아의 아버지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 것이라면. 


이언 매큐언의 신작 <넛셸>은 바로 그와 같은 상황에 놓인 태아의 이야기를 그린다. 작가는 출산을 앞둔 며느리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태아의 고요한 존재감을 강렬하게 인식했고, 얼마 후 셰익스피어의 명작 <햄릿>을 읽으면서 삼촌에 의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빼앗긴 햄릿의 고뇌를, 삼촌과 어머니의 불륜을 목도하고 이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사실을 알면서도 세상으로 나와야 하는 태아의 갈등으로 치환하는 기발한 발상을 떠올렸다. 


주인공 햄릿은 만삭인 어머니의 뱃속에서 어머니 트루디와 삼촌 클로드가 아버지 존의 눈을 피해 만남을 가지고 몸을 섞는 것을 지켜본다. 햄릿은 어머니가 이미 한 남자와 결혼해 그의 아이를 밴 몸인데도 음주를 즐기고 삼촌과의 정사를 받아들이는 것을 증오하면서도, 어머니의 몸에 기생하는 한 어머니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고, 심지어는 어머니가 마시는 와인의 맛을 같이 즐기는 독특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이래서 임신 중 음주가 위험하다고 하는 걸까). 


햄릿은 어머니와 삼촌이 아버지의 재산을 가로채고 떳떳하게 사람들 앞에 나설 요량으로 아버지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 것을 알게 된다. 햄릿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할 아버지에게 경고하고 싶지만 어머니 뱃속에 있는 태아에게는 아무런 힘도 방법도 없다. 결국 아버지는 죽음을 맞게 되고, 햄릿은 부정한 어머니와 음험한 삼촌이 기다리는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할 처지에 몰린다. 햄릿에게 남은 선택은 단 하나.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와 음모로 얼룩진 가족 관계 속으로 들어가 사느냐, 아니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죽느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셰익스피어의 명작 <햄릿>을 이언 매큐언의 스타일로 각색한 것이 재미있고, 어머니와 삼촌의 불륜, 아버지의 죽음을 어머니의 뱃속에서 목도한 태아가 품을 법한 생각들을 시시콜콜한 것까지 상상해낸 작가의 능력이 놀랍다. 이언 매큐언의 대표작 <속죄>처럼 한숨에 읽을 만한 소설은 아니지만, 끝까지 읽고 문장들의 의미를 곰곰 생각해본다면 색다른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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