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따금 일제 강점기에 살았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운 나쁘게 한반도 이남이 아닌 이북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정의와 자유를 위해 이 한 몸 기꺼이 바쳤을 것,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내가 그렇게 용감하지 않고 이타적이지 않은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안다. 기껏해야 부역자가 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피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데 급급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다. 


줄리언 반스의 신작 <시대의 소음>의 주인공이자 러시아의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친 쇼스타코비치가 처한 상황도 비슷하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두각을 보였으며 젊은 나이에 이미 천재 작곡가로 추앙받았던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정권을 잡으면서 정권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만들거나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하는 궁극의 선택 앞에 놓인다. 결국 쇼스타코비치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음악가로서의 자존심을 꺾는 쪽을 택하고, 이후 권력과 양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삶을 살게 된다. 


어떻게 권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어, 라고 비난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다. 쇼스타코비치가 처한 상황만 봐도 그렇다. 쇼스타코비치는 열아홉 살 때 스탈린 앞에서 연주를 하다가 단 한 번 실수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겨우 목숨을 부지해 소비에트 대표단의 일원으로서 미국에 가지만, 자신의 우상을 자본주의의 하수인이라고 비판하도록 강요받는다. 마침내 명예를 회복해 금지된 곡들을 연주할 수 있게 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괴롭힌 공산당에 가입해야 한다. 어느 누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과거 러시아에서 쇼스타코비치처럼 고생한 문화 예술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수십 년 후 대한민국에서 얼마 전까지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못해 뜨악하다. 그 이름도 흉악한 블랙리스트다. 


정권에 충성하지 않거나 방해가 되는 문화 예술인들의 목록을 만들도록 대통령(과 비선실세)가 지시하고 관료와 공무원들이 정연하게 움직였던 것이 불과 몇 달 전까지의 일이다. 블랙리스트에 가담한 부역자들이나 정권에 납작 엎드리는 쪽을 택한 문화 예술인들 -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 에게도 그들 나름의 피치 못할 이유가 있겠지만, 양심과 자존심을 택한 대가로 입에 재갈이 물려지고 생계를 위협당한 블랙리스트 문화 예술인들을 생각하면 역시 용서하기 힘들다. 용서할 수 없다.


쇼스타코비치,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시대의 소음'과 맞서 싸우느라 고생했어, 라고 위로하자니 마음이 석연치 않다. 그렇다고 당신은 부당한 권력 앞에 복종했으니 예술을 말할 자격이 없어, 라고 비난하자니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 비겁하지 않은 내가 민망하고 부끄럽다. 그렇다고 쇼스타코비치처럼 기꺼이 자존심을 꺾거나 목숨을 바칠 만큼 소중한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 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걸까. 새삼 돌아보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