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치지 않아
정미진 지음, 싹이돋아 그림 / 엣눈북스(atnoonbooks)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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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과 수한은 한 건물에 산다. 회사에서 잘리고 혼자서 핸드메이드 제품을 만들어 파는 이은과, 사람이 싫어서 동물을 돌보는 수의사가 된 수한은 첫 만남부터 죽이 잘 맞는다. 둘 다 식물을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무리하기보다는 가지고 있는 것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기를 꿈꾼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아본다. 서로가 같은 종족임을. 


이은은 초식녀. 수한은 초식남. 약육강식, 적자생존이 원칙으로 자리 잡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두 사람은 수한의 옥탑방을 자신들만의 비밀스러운 아지트 내지는 피난처로 삼는다. 혼자일 때는 외롭고 약하지만 함께 있을 때는 외롭지도 약하지도 않다. 하지만 세상은 두 사람이 마냥 여유롭고 편안하게 지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직접 만든 핸드메이드 제품을 팔아서 생활하는 이은은 경제적인 압박에 시달리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마저 암 진단을 받으면서 돈도 못 벌고 시집도 안 가는 철없는 딸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수의사로 일하는 수한은 몇 년 전 전염병이 돌았을 때 동물들을 살처분하는 모습을 목격한 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동물 병원에서 동물들을 진찰하고 돌볼 때는 행복하지만, 동물 병원 앞에 동물을 버리고 도망가는 사람들이나 길강아지, 길고양이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인류애가 사라진다. 


같은 여성으로서 이은이 겪는 고통이 마치 내 이야기처럼 절절하게 다가왔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돈을 못 벌고, 돈을 벌려고 하면 여러 가지 조건이 발목을 잡는다. 스펙 없고 인맥 없으면 취업이 어려운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이지만, 여성의 경우 나이 제한과 결혼 및 출산에 대한 압박이 남성보다 크다. 직장 내 성희롱 또는 성폭력도 여성에게는 현실적인 공포다. 


위로를 받으려고 친구들과 연락을 하면 다른 세상 이야기가 펼쳐진다. 대기업에 들어간 친구는 명품 백에 자동차에 아파트까지 마련했고, 공무원 또는 공기업 같은 안정적인 직장을 잡은 친구는 미취업 상태인 내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한다. 나는 하루하루 사는 것도 벅찬데, 누구는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벌써 애 엄마가 되었다.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 살았는데 나만 왜 이럴까. 나만 미련한 걸까.


이은과 수한은 아무도 해치지 않고 살고 싶다. 누가 누구를 해치거나 잡아먹지 않아도 햇빛과 물, 토양만으로도 잘 살아가는 식물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세상은 결코 이들을 편하게 내버려 두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이들을 괴롭히지만, 비바람이 몰아쳐도 잠깐 엎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식물처럼 이은과 수한은 그렇게 일어선다.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자신들답게 사는 법을 익혀나간다. 


내 이야기 같아서 좋았고, 내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나도 이은처럼 나만의 힘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수한처럼 내 반쪽같이 여겨지는 상대를 만났으면. 최근에 읽은 그 어떤 성장 이야기보다 공감되고, 그 어떤 러브 스토리보다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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