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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 호모 루덴스를 위한 철학사
정낙림 지음 / 책세상 / 2017년 5월
평점 :
누가 못마땅한 발언이나 행위를 할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놀고 있네." 이 말 한 마디만 봐도 우리가 얼마나 놀이를 하찮게 여기고 죄악시하는지 알 수 있다. 그뿐인가.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놀지 말고 공부하라고 잔소리하고, 상사들은 부하들에게 그만 놀고 일하라고 채근한다.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딴 눈을 팔면 '노는 아이'라고 낙인찍고, 멀쩡한 성인이 일을 하지 않으면 '놀고 있다'라고 한다.
왜 우리는 놀이를 이렇게 하찮게 여기고 죄악시하게 되었을까.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에 그 답이 있다. 이 책은 놀이를 둘러싼 고대, 근대, 현대적 사유 유형을 살피고, 니체의 놀이 철학에 기초해 현대예술과 놀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저자는 철학사에서 놀이에 대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평가가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 플라톤을 든다. 플라톤은 놀이를 참과 거짓, 선과 악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인간의 정신을 실재가 아닌 그림자 또는 가상으로 이끈다고 보았다. 이데아를 중시한 사상가답게 이데아의 모상인 예술이나 놀이를 평가절하했다.
플라톤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놀이는 오랫동안 철학자들의 탐구 주제가 되어 왔다.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놀이를 본격적으로 철학의 주제로 삼았으며, '놀이하는 아이(aion)'를 통해 삶과 세계의 본질을 파악했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이라는 책에서 놀이를 비중 있게 다뤘으며, 놀이가 필연과 자유의 세계를 연결하는 끈으로서 지성과 상상력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실러는 인간의 근본적인 두 충동, 즉 이성에 기초한 형식 충동과 감성 충동이 조화를 이룰 때 놀이충동이 발생하며, 이 놀이충동이 발생할 때 인간은 비로소 완전한 존재가 된다고 사유했다.
놀이에 대한 연구에서 니체가 차지하는 지위는 특별하다. 니체는 이미 유럽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놀이에 주목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문화를 높이 평가했고, 그리스 문화의 뿌리에 있는 놀이야말로 니체 철학의 핵심인 예술철학, 관점주의, 힘을 향한 의지, 영원회귀 등과 관련이 있는 행위다. 관점주의, 하이데거, 가다머, 핑크, 비트겐슈타인 등의 철학자가 니체에 이어 놀이를 철학적으로 연구했다.
놀이에 관한 연구가 이렇게 오랫동안 이뤄졌을 줄이야. 플라톤, 칸트, 니체,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들이 모두 놀이에 관심 있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20세기 이후 등장한 다다, 플럭서스 등의 예술 운동도 니체의 놀이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최근 융성하는 디지털 문화 역시 핵심 개념은 놀이다. 어쩌면 놀이야말로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열쇠가 아닐까. 놀이에 관해 좀 더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