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반유대주의



1. 상식에 대한 만행


86. 인간은 권력이 모종의 기능을 하며 일반적으로 유용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아는 까닭에 실질적 권력에 복종하거나 견디는 한편, 권력 없이 부만 가진 사람들을 증오한다. 착취와 억압조차도 사회가 돌아가게 만들고 나름의 질서를 확립시킨다. 단지 권력을 상실한 부와 정책적 대안 없는 냉소만이 기생충 같고 무용하며 역겨운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이런 조건이 사람들을 서로 묶어주는 끈을 모두 잘라버리기 때문이다. 착취하지 않는 부에는 흔히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마저 결여되어 있다. 정책 없는 냉소에는 착취자가 피착취자에 대해 통상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관심조차 있지 않다.


87. 유대인은 언제나 희생양이라는 이론은 그밖의 누구라도 유대인처럼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중략) 이른바 희생양은 이제, 세상이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그 대신 처벌을 면하고자 하는 무고한 희생자가 아니다. 세상사에 관여하는 여러 집단 중 한 집단의 사람들이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집단이 세상의 불의와 잔혹함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공동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87. 근대의 독재정치가 과거의 다른 모든 전제정치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테러가 예전처럼 정적 제거나 위협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고 이제 완전히 순종적인 인민 대중을 지배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테러는 아무런 예고 없이 발생하며, 테러범의 관점에서도 희생자는 무고하다. 이는 나치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 유대인, 국민국가 그리고 반유대주의의 발생


101. 집단으로 보면 서구 유대인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수십 년 동안 국민국가와 함께 해체의 길을 걸어왔다. 전후 유럽이 급속히 몰락하면서 유대인 역시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을 박탈당하고 한 무리의 부유한 개인들로 원자화된다. 제국주의 시대에 유대인의 부는 그 중요성을 상실했던 것이다. 국가들 간에 권력의 균형 감각이나 유대성이 없던 유럽에서 범유럽적 유대인이란 요소는 그들의 무익한 부로 인해 일반적인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권력의 결여로 인해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113. 유대 민족은 모든 유럽 민족 가운데 국가 없는 유일한 민족이었고, 바로 이 때문에 정부나 국가가 무엇을 대변하든 상관없이 이들과 동맹을 맺는 데 가장 열성적이고 적합한 민족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유대인은 정치적 전통이나 경험이 없었고 그들의 새 역할이 안고 있는 명백한 위험과 권력 가능성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 간의 긴장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116. 반유대주의는 100여 년 동안 점진적으로 거의 모든 유럽 국가의 거의 모든 사회 계층으로 퍼져갔고 결국 다른 문제에서는 절망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여론을 하룻밤 사이에 일치시킬 수 있는 이슈로 갑자기 부상했던 것이다. 이 과정의 발전 법칙은 간단하다. 국가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사회집단은 바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국가 자체와 갈등에 빠지게 된 사회 계급은 반유대적이 된다. 


121. 유대인은 국가에 근원을 둔 권력과의 밀접한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권력과 동일시되었으며,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가까운 가족끼리 모여 지냈던 관계로 피할 수 없이 모든 사회 구조의 파괴를 위해 일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3. 유대인과 사회


162. 근대가 안고 있는 독특한 위험이자 가장 큰 도전은, 이때 처음으로 인간이 인간을 상이한 환경과 조건의 보호막 없이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평등 개념이 근대의 인종 관계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인종 관계란 뚜렷한 조건의 변화를 통해서도 약화될 수 없는 자연적 차이가 문제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178. '보통' 유대인을 차별하고 동시에 교육받은 유대인이 상류사회의 사교계에 진입하기가 유사한 비유대인보다 더 쉬웠던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유대인은 스스로를 '일반 유대인'과 분명하게 구분해야만 했으며 또한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표시도 분명하게 들어내야만 했다. (중략) 이것은 실제로 유대인이기 때문에 거리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느낌, 그리고 '보통의 유대인' 같지 않기 때문에 집에서도 다른 유대인들과 다르다는 느낌으로 귀결된다.


214.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 지위를 잃은 모든 계급은 결국 그들 자신의 폭민 조직을 통합하고 확립한다. 폭민 조직의 선전과 매력은 다음의 가정을 기초로 한다. 즉 악덕의 형태를 띤 범죄를 기꺼이 자신의 구조 안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사회는 이제 공개적으로 범죄자를 허용하고 공적으로 범죄를 자행하면서 악덕을 청소할 차비를 갖출 것이라는 가정 말이다.

 


4. 드레퓌스 사건


242, 폭민은 일차적으로 각 계급의 낙오자들을 대표하는 집단이다. 이 때문에 폭민을 국민과 혼동하기 쉽다. 국민 역시 사회의 모든 계층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국민이 모든 혁명에서 진정한 대의제를 위해 투쟁했다면, 폭민은 항상 '강한 자', '위대한 지도자'를 소리 높여 외친다. 폭민은 자신을 소외시킨 사회를 증오하며, 자신을 대변해주지 않는 의회 역시 증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민의 지도자들이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던 수단인 국민 투표제는 폭민에 의존하는 정치가들의 낡은 개념이다.


261. 드레퓌스 드라마가 희극이었다는 사실은 오로지 그 마지막 장에서 분명해진다. 분열된 국가를 일치단결시키고 의회를 재심 찬성의 방향으로 변화시켰으며 결국 극우에서 사회주의자에 이르는 완전히 이질적인 집단을 화해시키도록 도와준 신은 바로 1990년의 파리 박람회였다.


263. 시온운동은 반유대주의에 대항하여 유대인이 발견할 수 있었던 유일한 대답이었고, 자신들을 세계적 사건의 중심에 세웠던 적대감을 심각하게 고려한 유일한 이데올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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