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에게서 버림받은 '영웅'처럼 가련한 신세는 없다. (중략) 영웅은 민중이 만드는 것이며, 민중에게서 버림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그에 앞서서 그가 민중을 배반했다는 엄연한 인과응보의 논리이다. (117쪽)


저자는 이 장에서 한때 중국민중의 영웅이었던 장개석과 중국 공산당의 영웅인 모택동에 대해 제3자적 관찰과 공식문서를 근거로 비교한다. 장개석이 대표하는 중국은 중국 근대사에서 제2혁명이라고 불리는 1926~27년부터 국민당정권이 1949년 5월 중국 본토에서 쫓겨나 대만으로 낙향하는 20여 년을 일컫는다. 장개석은 진시황 이래 처음으로 한족에 의한 중국통일을 달성했다. 


문제는 장개석을 비롯한 국민당 정권의 출신성분이다. 국민당 정권은 지주, 상인, 은행가, 공장주 등 도시 자본가 계급과 화교가 중심이었다. 정권이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은 당연한데, 이 이익이 농민 또는 노동자 계급의 이익과 배치되니 갈등은 처음부터 예고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국민당 정권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지지가 필요했다. 영국, 미국, 프랑스는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선 공산당을 타도하고 국민당과 손잡을 필요성이 있었다. 아시아에서 사회주의를 몰아내는 것은 일본의 목표이기도 했기에 국민당은 자연히 일본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자신들의 실패를 예비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부시책에 비판적인 세력이나 지성인, 자유주의자는 처음에는 경원되다가 전쟁 후기에 가서는 투옥되었다. 언론통제, 비밀경찰에 의한 통치, 대학에 대한 당의 통제, 그밖에 일인, 일당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리고 불가피한 온갖 추악한 현상이 표면화했다. 그것은 일견 정권의 강력함을 뜻하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가장 약한 권력의 특징임을 우리는 차차 알게 된다. (134쪽)


1937년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중일 전쟁이 발발한다. 이때 장개석의 인기는 전보다 더 상승한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전쟁은 전 인민적 성격을 상실하고 점점 개인적 목적을 위한 전쟁으로 바뀌었다.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이 정부에 비판적인 세력은 투옥되었고, 정부는 혼란을 틈타 재벌 및 은행과 손을 잡고 권력을 독점 및 농단했다. 


그 사이 공산당군은 민중의 마음을 얻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이나 국민당군대에서 빼앗은 무기로 농민을 무장시켰고, 농민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곧 나라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며 나라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곧 농민의 이익을 지키는 것임을 말로만 하지 않고 실천으로 ㄹ보였다. 결국 1945년 항일전이 끝났을 때 중국 민중이 원하는 것은 국민당이 아니라 공산당임이 확실해졌다. 이는 공산당이 당시 중국 민중이 원하던 전략을 펼쳤기 때문만이 아니라, 국민당이 애초부터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스스로 노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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