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침에 눈을 뜨면 바람이 부는 대로
사노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어제는 몸이 안 좋아서 광화문 촛불집회에 못 나가고 집에서 쉬었다. 올겨울 추위에 대비해 새로 산 양모 이불을 덮고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누워 책을 읽는 기분이 편치만은 않았다.
편치 않은 기분으로 집어 든 책은 일본의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의 수필집 <느낌을 팝니다>였는데, 여러모로 의외인 점이 많은 책이지만 중간에 사노 요코의 이야기가 나와서 반가움 반, 놀라움 반(사노 요코가 암으로 여명 이 년을 선고받고 돌아오는 길에 재규어를 구입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 사노 요코가 쓴 첫 번째 수필집 <아침에 눈을 뜨면 바람이 부는 대로>를 읽고 서평을 쓰지 않은 게 생각났다.
사노 요코는 한국에서는 수필집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등이 잇달아 출간되며 최근 몇 년 유명해진 작가이지만, 일본에서는 1990년대에 이미 수필가로 인기를 끌고, 그전에는 <100만 번 산 고양이>라는 동화책으로 스타덤에 오른 그림책 작가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바람이 부는 대로>는 사노 요코가 40대에 처음 발표한 수필집으로 작가의 불우했던 유년 시절과 다사다난했던 학창 시절, 유학 시절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어린 내가 저지른 무수한 실수, 어른들이 내게 한 많은 질타와 비난을 나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어쩌면 부모님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내게 혀를 찼을지도 모르고, 나도 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여름 초저녁, 수박을 깬 내게 혀를 찬 삼촌이 싫지는 않았다. 내게 보이는 것은 덜렁거리다 수박을 깬 혐오스러운 아이인 나였다. 나는 삼촌 눈에 비친 나를 혐오했다. (50쪽)
저자는 학창 시절 고향인 시즈오카를 떠나 도쿄에 있는 이모 집에서 하숙을 했다. 어느 날 아침, 창을 여니 눈이 와 있었고, 가난한 집 부유한 집 할 것 없이 지붕마다 새하얀 눈이 쌓인 것을 보며 저자는 <마쿠라노소시>를 쓴 세이 쇼나곤을 떠올렸다. '가난하고 지저분하고 추접스러운 집에 눈이 내려 운치가 나는 것은 건방지다.' 라고 '너무나 솔직하게' 감상을 밝힌 세이 쇼나곤을 저자는 좋아했다.
세이 쇼나곤의 글과 마찬가지로 저자의 글도 '너무나 솔직하'다. 어린 시절 정원에 피어 있던 달리아의 목을 꺾었을 때 아버지가 "너도 그렇게 해줄까" 하고 팔을 비틀었던 일, 저자의 오빠가 죽은 후 어머니가 웃음을 잃고 남은 자식들에게 구박과 학대를 일삼았던 일, 전학 간 학교에서 '때려도 울지 않는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남자아이들한테 얻어맞았던 일, 대학 시절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으나 짝사랑하던 남학생에게 일을 미루고 농땡이를 부렸던 일 등 부끄러운 일, 감추고 싶은 일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왜 어린이 그림책을 그리는가. 내 결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내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나는 객관적인 어른으로서 어린이를 관찰하고 이해하고 어린이에게 말을 거는 게 아니다. 나는 어김없이 내 속에 있는 어린 시절의 나를 향해 얘기하고 있다. 나는 소처럼 삼켰던 것을 되새기고, 되새긴 것을 삼키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내가 어린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어린이 속에서 어린 나를 발견했을 때뿐이다. (153쪽)
저자는 가난하고 무능력했던 아버지와 어린 자식들을 구박하고 학대했던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는다. 울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타를 정당화했던 아이들, 자신을 여자로 봐주지 않았던 남자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저자는 자신을 질타하고 비난하고 무시하고 혐오했던 이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기억한다. 사랑받고 싶었던 상대에게 사랑받지 못한 나, 사랑받을 수도 없고 사랑받으려고 애쓰지도 못한 나를 향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저자가 어린이 그림책을 그리게 된 것도 같은 이유다. 저자의 오빠는 그림을 잘 그렸다. 그림을 그릴 때의 오빠는 뭔가에 빙의된 것 같았다.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오빠는 죽었고, 저자는 오빠가 남긴 크레파스와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미대에 입학하고 그림책 작가가 되었지만 "그림 그리는 일이 사실은 오빠 같은 사람에게만 허락된 일이라는 환상"을 오랫동안 지우기 어려웠다. 저자는 일찍 세상을 떠난 오빠와 오빠만 그리워하고 자기는 예뻐해 주지 않았던 부모를 탓하지 않는다. 다만 오빠보다 오래 산 나, 끝내 오빠 같은 자식은 될 수 없었던 나를 생각한다. 그것은 위로일까, 저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