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절벽 - 성공과 행복에 대한 거짓말
미야 토쿠미츠 지음, 김잔디 옮김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사랑할 가치가 있는' 일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계층 이동과 근로자의 자율성을 보장한다. 하지만 오늘날 근로자들이 이런 일을 하려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한다. 값비싼 학위와 자격증을 따야 하고, 인권 침해에 가까운 감시를 받아들여야 한다. 게다가 그 일을 좋아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적은 보수를 받으면서 '전력을 다해' 오랜 시간을 일해야 한다. (pp.18-9)


"위대한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 애플의 전 CEO 스티브 잡스가 남긴 말이다. 스티브 잡스는 자기 일을 사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침이면 빨리 출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잠에서 깼다. 거울을 볼 때면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는 일을 할 것인가?" 라고 묻고 "아니"라는 답이 나오면 변화를 꾀했다. 


취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스티브 잡스는 나의 멘토였다. 스티브 잡스의 명언을 자기소개서와 면접에 여러 번 인용하기도 했다. 스티브 잡스처럼 아침마다 일하고 싶어 죽겠다는 기분으로 직장에 달려가고 싶었고, 거울을 볼 때도 일 생각을 놓지 않는 사회인이 되고 싶었다. 막상 취업을 하고 보니 스티브 잡스의 말은 딴 세상 얘기였다. 아침마다 출근하기 싫어 죽겠고, 피로에 절어 생긴 다크서클 때문에 거울 보기가 두려웠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는 일을 할 것인가?" 대답은 "아니"였다. 


<열정 절벽>의 저자 미야 토쿠미츠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만연한 '좋아하는 일을 하라 Do What You Love, DWYL'는 환상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근로자'를 이상적인 근로자의 모습으로 여기고 스스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지만 이는 허상에 불과하다. 좋아하는 것과 보수를 받기 위한 노동은 일치하기 어려우며, 행여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보수를 받는다 해도 그 일이 즐거움과 행복, 자아실현으로 연결된다고 보장하기 어렵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구호는 근로자가 아니라 자본가의 이익에 더 부합한다. 승자독식의 자본주의가 성장하는 것과 사랑과 열정, 행복 등을 임금노동과 연관 짓는 미사여구가 급증한 것은 무관하지 않다. "열정이 있는 곳에 성공이 따른다", "최고의 삶을 살라" 등의 구호가 늘어날수록, 근로자는 자신의 노동을 저렴한 가격에 파는 것을 합리화하고 지나치게 일에 몰두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직장과 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쉽다. (당연하게도) 그 열매는 근로자가 아니라 자본가의 몫이다. 


사람들은 일을 즐길 수 없거나 사랑하는 일을 찾지 못할 때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문가주의는 '성취감을 가져다주는' 일을 제시했지만, 이런 일은 상당수가 비전문화되었거나 아예 사라졌다. ... 중간 수준의 괜찮은 일자리가 정말로 사라지고 있다면, 이제 사랑과 자율성이라는 미사여구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정해야 한다. (p.107)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구호는 노동 환경의 변화로 인한 문제를 미온적으로 해결하려는 수단이다. 기계화와 산업화로 인해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소수의 간부급 임원과 고위 관리직을 제외하고 거대 조직을 뒷받침하던 중간 관리직이 대거 없어지고 단순 업무를 처리하는 하위직만이 남아있는 실정이다. 


대학(또는 대학원)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단순 업무를 처리하고 낮은 임금을 받는 생활에 만족하게 하려면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믿음만 한 것이 없다. 기업은 근로자가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을 보고 인턴을 하고 취업을 하고 업무 성과를 올리고 승진 경쟁을 하는 모든 단계에서 근로자가 스스로 "이 일을 하고 싶다", "이 일을 좋아한다"고 인정하도록 강요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탈락시킨다. 근로자는 "이 일을 하고 싶다", "이 일을 좋아한다"고 스스로를 세뇌하거나 거짓말을 해야만 기업에 남고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궁지에 몰린다. 


"전통적으로 금전적인 보상을 받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답은 가정에서 일하는 여성이다. ... 이렇게 뿌리 깊은 성향은 가정을 벗어난 직장에서도 이어진다. 고분고분 협조하고 끊임없이 감사를 표하며 무상 또는 아주 적은 돈을 받고 일할 것을 강요하는 일자리는 전통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놓인 여성들에게 주어지기 쉽다. (pp.122-1) 


저자는 여성 문제도 지적한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가정에서 식사 준비나 청소, 빨래, 육아 등을 담당했으며 이는 노동으로 인식되지도 않고 당연히 보수가 주어지지도 않았다. 이런 일은 "사랑과 의무의 표현"이며 "아내이자 엄마로서 당연히 해야 할 역할"로 여겨졌다. 문제는 여성의 일을 저평가하는 인식이 가정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임금 차별은 국가와 직종을 초월하며, 특히 한국은 성별 임금 격차가 36.7%에 달해 OECD 회원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이는 남성이 100만 원을 벌 때 여성은 63만 3000원을 번다는 뜻이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일을 좋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일을 좋아한다는 것이 적은 보상과 비인간적인 대우를 감내하도록 강요당하는 이유가 되어선 안 된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말을 따랐다가 내 노동을 헐값에 팔고, 일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휴일도 반납하고 다른 사람의 일까지 떠맡아해야 했던 날들이 떠오른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열정 노동'을 하고 있으리라. 언제쯤 이 문제가 바로잡아질까.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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