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비서들 - 상위 1%의 눈먼 돈 좀 털어먹은 멋진 언니들
카밀 페리 지음, 김고명 옮김 / 북로그컴퍼니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뉴욕대를 졸업한 티나 폰타나는 세계 굴지의 언론사 회장이자 억만장자인 로버트의 비서다. 호화로운 사무실에서 유력 인사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니 남들 눈엔 잘 사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학자금 대출에 허덕이고 원룸 월세를 내기에도 빠듯한 월급을 받으며 연애는 꿈도 못 꾸는 팍팍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티나에게 회사 돈 2만 달러가 굴러들어온다. 며칠을 고민하던 티나는 눈 딱 감고 학자금 대출을 갚아버린다. 이 일을 알아챈 경비 처리부서의 비서 에밀리는 티나를 고발하기는커녕 로버트의 영수증을 위조해 자신의 학자금 대출 7만 달러도 갚아달라고 강요한다. 에밀리의 학자금 대출을 갚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회계팀장이자 회사의 왕언니인 마지가 다른 비서들의 학자금 대출도 갚아달라고 부탁하며 이들의 횡령 액수는 점점 커진다.  

소심한 티나는 당장이라도 이 일을 그만두려 하지만 그만둘 수 없는 강력한 이유가 생긴다. 티나는 회사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직원으로 손꼽히는 케빈과 '썸타는' 중인데, 하필이면 케빈이 티나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그 비밀이 여성들의 권익 향상을 위한 사회적 활동이라고 제멋대로 오해하면서 티나에게 푹 빠진 것이다. 티나는 케빈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서라도 횡령 사실을 들키지 않고 일을 잘 마무리해야 하는데...... 

'내가 낡아빠진 화장실 배수구가 막혀서 사람 부르는 데 필요한 돈으로 로버트는 컨트리클럽에서 테니스를 한 판 치는구나.' '내가 제멋대로 꺼지지 않는 컴퓨터를 사는 데 필요한 돈으로 로버트는 벤츠에 희한한 성분으로 된 광택제를 바르는구나(새끼 공룡 태반으로라도 만들었나 보지).' '내가 지하철 월 정기권 끊는 돈으로 로버트는 자기 이니셜이 새겨진 고급 손수건을 사서 일회용품처럼 한 번 쓰고 버리는구나.' (p.79) 

소설을 읽는 내내 '흙수저 금수저 논란'이 떠올랐다. '흙수저' 티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나름 명문대에 들어갔고 열심히 취업활동해서 취업에 성공해 열심히 일했지만 남은 건 쥐꼬리만한 월급과 학자금 대출뿐이다. '금수저' 로버트는 젊은 시절 거액을 탈세했는데도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았고, 이후 승승장구해 언론사 회장직에까지 올라 평범한 직장인의 월급에 맞먹는 돈을 술값, 옷값으로 흥청망청 쓰고 그걸 또 회사 이름으로 결제하여 거대한 부를 축적한다. 흙수저 티나는 금수저 로버트를 규탄하기는커녕 로버트의 아랫사람으로 일하며 일종의 '부역'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다. 흙수저가 금수저의 주머니를 턴들 금수저는 까딱도 하지 않는다.  

티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처음으로 자기만 흙수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티나는 자기 또래 여성들 중 누구도 학자금 대출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 했다. 다들 좋은 직장에 다니고 비싼 차를 몰고 유명 브랜드 옷을 입어서 (자기만 빼고) 다들 잘 사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들은 티나와 똑같은 처지였다. 그들은 저마다 업계에서 이름난 상사들을 모시고 그들의 이름을 빌어 호의호식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번드르르한 겉모습 뒤로 왠지 저녁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것 같은 굶주림이 느껴졌고, 그중 적어도 한 명은 월세를 내기 위해 난자를 팔 생각도 해본 적이 있을 것 같았다'. 

요즘 학생들은 참 대견스럽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빚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며 날로 치솟는 대학 교육 비용을 선뜻 받아들입니다. 그런 장애물이 아무리 앞을 가로막아도 절대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대출금 상환 압박에 시달리면서, 괜찮은 보수를 주는 좋은 일자리를 찾으려 고군분투하다가, 그러면서 언젠가 집을 사게 될 날을, 혹은 가정을 꾸리게 될 날을 꿈꾸다가...... 그러다가 무덤에 들어가고 맙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구를 탓하는 줄 아십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왜 나는 안 될까?'라고 자책하는 겁니다. (p.257) 

티나는 자기와 별로 다르지 않은 여성들이 비정규직으로 몇 년째 건강보험도 없이 살거나 방 하나 딸린 집에서 룸메이트 둘이랑 간신히 먹고 사는데, 그들이 모시는 상사들은 점심 먹고 명품숍에서 회사원 연봉에 맞먹는 돈을 한 번에 쓰거나 원룸 월세에 상당하는 돈을 택시비로 쓰는 현실에 개탄한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왜 우리 인생이 하나같이 개판이냔 말이야? 아니, 우리가 대학까지 나온 백인 여성인데, 이런 씨, 지금 이게 말이 돼?' 

소설 속에서 티나는 또래 여성들의 삶이 자신의 삶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놀랐지만, 나는 소설에 나오는 여성들의 삶이 나의 삶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어쩌면 이렇게 비슷할까. 나라꼴 돌아가는 모습까지 닮은 건 우연일까 필연일까. 미국에서는 이 소설이 지난 5월에 출간되자마자 <뉴욕타임즈>, <퍼블리셔서 위클리>, <피플>, <뉴스데이>, <오프라매거진> 등 주요 언론에서 극찬에 가까운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어 부디 소설에 나오는 문제 의식과 대안이 현실에서도 실현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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