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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하이든
사샤 아랑고 지음, 김진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6월
평점 :
유럽 속담 중에 '모든 소방관은 방화범이 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있다. 불을 끄는 일을 하다 보면 불을 내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자리 잡기 쉽다는 뜻이다. 이 말은 학문적으로도 일리가 있다. 융에 따르면 인간은 자아와 그림자 간에 균형을 유지하려는 본능이 있다. 빛을 많이 받을수록 그림자가 커지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을수록 내면이 황폐해진다. 반대로 내면이 황폐한 사람일수록 사회적 명예와 인정을 추구하기 쉽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 헨리 하이든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삶은 거짓 투성이다. 부인 마르타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좀도둑질로 끼니를 잇고 여자들을 등쳐먹는 인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마르타를 만났고, 평소처럼 재미만 보고 떠나려던 차에 마르타가 쓴 소설을 읽게 되었다. 읽자마자 엄청난 작품이란 걸 직감한 그는 마르타를 설득해 소설을 출판사에 보냈다. 소설을 쓴 사람이 마르타란 사실을 숨기는 것을 조건으로. 그로부터 8년 동안 하이든은 마르타가 쓴 소설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리며 편안하게 살았다. 그의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출판사 여직원 베티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다. 베티는 자기가 하이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마르타에게 알리겠다고 전했다. 마르타 없이는 지금의 부와 명성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하이든으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베티를 저지해야 했다. 과연 그는 베티를 저지할 수 있을까.
헨리 하이든의 처녀작 <프랭크 엘리스>는 전 세계적으로 천만 부가 팔려나갔다. 흔히 말하듯 폭발적 힘을 지닌 강력한 소설이었다. 자폐증을 앓던 소년이 경찰관이 되어 누이를 죽인 범인을 찾으러 다니는 내용인데, 처음 찍은 10만 부는 겨우 한 달 새 다 팔려버렸다. 팔리기만 한 게 아니라 분명 읽히기도 했을 것이다. 파산 위기에 놓여 있던 모리아니 출판사는 그 돈으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헨리는 자신의 책이 20가지 언어로 번역되어 팔리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수많은 문학상의 수상자가 됐다. (중략) 그리고 헨리는 여전히 마르타와 함께 살고 있었다. 헨리가 그 소설 중 단 한 문장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 자신과 마르타뿐이었다. - <본문 중>
베티가 하이든에게 임신 소식을 알렸을 때만 해도 하이든의 인생이 망가진다 한들 얼마나 망가질까 싶었다. 8년 동안 다섯 편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발표하며 부와 명예를 모두 얻게 된 그의 삶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리 없다고 여겼다. 문제는 하이든이 그동안 숨겨온 진실에 비하면 베티와의 불륜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하이든은 고아원에서 나쁜 짓을 저지르고 도망쳐 나왔다. 거리로 나온 뒤엔 좀도둑질을 하고 여자들을 괴롭히며 그야말로 쓰레기같이 살았다. 그런 그가 인생에서 딱 하나 잘 한 게 있다면 마르타가 쓴 소설의 가치를 발견하고 세상에 선보였다는 것인데, 여기서 또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른다. 마르타가 아닌 자기의 이름으로 소설을 발표한 것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명성을 얻는다고 이제까지 저지른 잘못들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8년에 걸쳐 출판사와 독자들을 속이며 더 큰 죄를 지었다.
빛을 많이 받을수록 그림자가 커지는 것처럼, 하이든의 인생도 빛을 많이 받을수록 더 큰 그림자가 지워졌다. 인기를 얻고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고 남들 보기에 잘 산다는 게 진정으로 좋은 걸까. 숨 가쁘게 읽었을 뿐인데 의외로 긴 여운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