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알랭은 거리를 걷다가 아주 짧은 티셔츠를 입은 아가씨들을 보며 배꼽에 대해 생각한다. 흔히 남자는 여자의 허벅지나 엉덩이나 가슴에 매혹된다고 한다. "하지만 몸 한가운데, 배꼽에 여성의 매력이 집중되어 있다고 보는 남자(또는 한 시대)의 에로티시즘은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한편 다르델로는 주치의로부터 암이 의심된다는 말을 듣고 걱정했다가 비로소 암이 아니라는 검사 결과를 받았다. 그런 다르델로의 속도 모르고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라몽은 이런 말을 한다. "즐겁게 사시는 것 같네요." 그 말에 빈정이 상한 다르델로는 라몽에게 암에 걸렸다는 거짓말을 한다. 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밀란 쿤데라가 2014년에 공개한 소설 <무의미의 축제>는 언뜻 '무의미한' 듯 보이는 에피소드의 '축제'로 보인다. 알랭과 라몽, 다르델로가 나오는 에피소드 외에도 스탈린과 흐루쇼프가 나오는 이야기가 중간에 삽입되어 짧은 길이의 소설인데도 쉽게 읽히지 않는다. 내용도 난해하다. "즐겁게 사시는 것 같네요." 라는 말이 고깝게 들렸다는 이유로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암에 걸렸다는 거짓말을 하는 다르델로, 파티에서 만난 포르투갈 여자의 환심을 사려고 통하지도 않는 파키스탄어를 하는 칼리방, 아무도 웃지 않는 농담을 해놓고 부하들이 뒷담화 하는 걸 훔쳐 듣는 스탈린까지, 내 머리로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인물들의 퍼레이드다. 


그러다 뜻밖에 마음에 박히는 문장을 만났다. 알랭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던 중 환각으로 나타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눈다. 어머니는 고백한다. "솔직하게 말할게. 누군가를, 태어나게 해 달라고 하지도 않은 누군가를 세상에 내보낸다는 게 나한테는 늘 끔찍해 보였다." 그러고는 덧붙인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권리들이란 그저 아무 쓸데없는 것들에만 관련되어 있어." 헌법에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고, 국가로부터 자유를 침해당하지 않고, 인간다운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받고, 각종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등의 기본적인 권리가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기본적인 권리조차 어떤 부모에게서 어떤 생김새와 어떤 성별로 태어나는가 하는 위험은 상쇄할 수 없다. 이것들이야말로 개인의 삶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데도 말이다.


저 사람들 전부 좀 봐라! 한번 봐! 네 눈에 보이는 사람들 중 적어도 절반이 못생겼지. 못생겼다는 것, 그것도 역시 인간의 권리에 속하나? 그리고 한평생 짐처럼 추함을 짊어지고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너는 아니? 한순간도 쉬지 않고? 네 성(性)도 마찬가지로 네가 선택한 게 아니야. 네 눈 색깔도. 네가 태어난 시대도. 네 나라도. 네 어머니도. 중요한 건 뭐든 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권리들이란 그저 아무 쓸데없는 것들에만 관련되어 있어, 그걸 얻겠다고 발버둥 치거나 거창한 인권선언문 같은 걸 쓸 이유가 전혀 없는 것들. 


얼마 후 라몽을 만난 알랭은 다시 배꼽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는다. "한 가지는 분명해. 허벅지나 엉덩이, 가슴하고는 다르게 배꼽은 그 배꼽을 지닌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고, 그 여자가 아닌 어떤 것에 대해 말한다는 거야." ... "배꼽은 단지 반복을 거부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반복을 불러. 이제 우리는, 우리의 천년 안에서, 배꼽의 징후 아래 살아갈 거야." 알랭의 말대로 인간은 '배꼽의 징후' 아래 살아가는 존재다. 언뜻 보기엔 어느 학교를 나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얼마나 돈을 버느냐 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같다. 하지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우연히 눈이 맞아 사랑에 빠지고 몸을 섞고 그렇게 생긴 아이를 낳기로 정하고 산고 끝에 낳아서 기르는 일만큼 한 사람의 삶을 크게 좌우하는 일은 없다. 결국 그렇게 태어난 아이의 인생은 아무리 기를 써봤자 그 부모가 물려준 눈코입의 생김새와 머리색과 키와 유전병과 경제력과 학력 등과 씨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알랭의 어머니가 남긴 말처럼 내 눈엔 '태어나게 해 달라고 하지도 않은 누군가를 세상에 내보낸다는 게' 그저 '끔찍해'보일 뿐인데, 그런데도 사람들은 계속 사랑을 하고 기어코 아이를 낳으니 위대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밀란 쿤데라의 소설만큼이나 어려운 문제다,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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