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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외동아이라는 사실을 몹시 싫어했던 소년 하지메는 자기처럼 외동인 소녀 시마모토와 친하게 지내다가 이사로 인해 헤어지고 어른이 된다. 그동안 다른 여자를 사귀기고 하고 유력가의 딸과 결혼해 아이도 얻지만, 하지메는 언제나 고독하고 인생에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하지메는 자신이 경영하는 재즈 바에서 손님으로 찾아온 시마모토를 다시 만난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그녀에게 빠진다. ...라는 줄거리만 보면 이 소설은 전형적인 불륜 소설이다. 아내도 있고 자식도 둘이나 있는 어엿한 가장이 가정을 버리고 일까지 포기하면서 첫사랑 뒤꽁무니를 쫓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소설엔 단순히 불륜 소설로만 치부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이건 왠지 내 인생 같지 않다고. 마치 누군가가 마련해둔 장소에서 누군가가 준비해 마련해준 방식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도대체 나라는 인간의 어디까지가 진짜 나이고, 어디부터가 내가 아닐까? 핸들을 잡고 있는 내 손의 어디까지가 진짜 내 손일까?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주변 풍경의 어디까지가 진짜 현실의 풍경인 것일까? (p.114)
하지메는 되는 대로 사는 인간이었다. 시마모토와 헤어진 후 처음 사귄 여자친구 이즈미와는 석연찮게 이별했다. 구체적인 계획이나 장래에 대한 포부를 세우지 않은 채 교과서 회사에 취직했다. 어쩌다 알게 된 여자와 결혼해 장인의 지원을 받아 재즈 바를 차리고 열심히 일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나이는 삼십 대 후반. 가게가 둘이나 경영하고, 교과서 회사에 다녔다면 상상도 못 했을 돈을 벌며, 도쿄에서도 노른자 땅인 아오야마에 살면서 두 딸을 사립유치원에 보낸다. 남들은 좋겠다, 부럽다고 하지만 정작 하지메 자신은 삶이 허무하다. 시간만 나면 오래전 거리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간 시마모토의 뒷모습을 그리워한다. '그 때 그녀를 잡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다.
시마모토, 가장 큰 문제는 내게 뭔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거야. 나라는 인간에게는, 내 인생에는, 뭔가가 빠져 있는 거야. 상실되어 버린 거야. 그리고 그 부분은 언제나 굶주려 있고 메말라 있어. 그 부분은 아내도 메우지 못하고 애들도 메우지 못해.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너 한 사람밖에 없어. (p.279)
얼마 후 거짓말처럼 시마모토가 하지메의 눈앞에 나타난다. 하지메는 처음에 시마모토와 재즈 바에서 한두 번 만나다가 나중엔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고 지방에 다녀오기도 하고 급기야는 늦은 밤 그녀와 단둘이서 아무도 없는 별장에 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점점 확신한다.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장인, 그런 장인과 자신을 연결하는 아내, 아내와의 사이에 둔 딸들, 장인이 차려준 멋들어진 재즈 바, 거기서 벌리는 엄청난 돈... 시마모토만 가질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고! 그러나 시마모토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하지메는 겨우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깨닫는다. 시마모토만 있으면 인생이 바뀔 거라는 믿음은 착각이고 거짓임을. 곁에 시마모토가 있든 아내가 있든 그의 오랜 결핍감과 고독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결핍감과 고독감을 잊기 위해 가족들에게 봉사하고 열심히 일하며 쌓은 시간의 켜는 쉽게 무너지지 않고 그가 스스로 무너뜨리지도 않으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라고 하면서 하지메가 조용히 아내 품으로 돌아와 원래의 생활로 돌아간다면 이 소설은 역시 그저 그런 불륜 소설에 그쳤을 테지만 하지메는 그러지 않는다. 아내 품으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원래의 생활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멋들어진 재즈 바를 경영하고 비싼 집에 살고 두 딸을 사립 유치원에 보내는 호사를 그저 장인이 쥐여준 성공의 부산물이나 시마모토라는 '가지 않은 길'을 포기한 대가로 여기지 않는다. 그것들 모두 자기가 직접 선택한 것이고 노력해 일궈낸 것임을 받아들인다. 시마모토는 환영처럼 사라졌지만 오랜 시간 동고동락한 아내 유키코는 자기 곁에 있다. 전공투 세대이면서 탐욕스럽게 돈을 벌고 장인의 원조를 받는 걸 석연찮게 여겨왔지만 휴일도 없이 출근하며 열심히 가게를 경영한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제는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현실에 발붙이고 있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늘 어떻게든 다른 인간이 되려고 했던 것 같아. 나는 늘 어딘가 새로운 장소에 가서, 새로운 생활을 하곤 했어. 거기에서 새로운 인격을 갖추려 했다고 생각해. 나는 이제까지 몇 번이나 그러기를 되풀이해왔지.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성장이었고, 어떤 의미로는 인격의 가면을 교환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지. (중략) 하지만 결국 나는 어디에도 다다를 수 없었던 것 같아. 나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일 수밖에 없었어. 내가 안고 있던 뭔가 빠지고 모자란 결핍은 어디까지나 변함없이 똑같은 결핍일 뿐이었지. 아무리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풍경이 바뀌고,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의 톤이 바뀌어도 나는 한 사람의 불완전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어. 내 속에는 늘 똑같은 치명적인 결핍이 있었고, 그 결핍은 내게 격렬한 굶주림과 갈증을 가져다주었어. 나는 줄곧 그 굶주림과 갈증 때문에 괴로워했고,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괴로워할 거야. 어떤 의미로는 그 결핍 그 자체가 나 자신이기 때문이지. (pp.325-6)
하지메에게 시마모토가 그러했듯이, 사람에겐 누구나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 가고 싶었던 대학, 오해로 끝난 첫사랑, 이루고 싶었던 꿈, 내 것이었으면 했던 삶... 그런 것들만 생각하느라 정작 자기가 발을 딛고 서있는 현실을 보지 못한다면 안타깝다. 나도 한때 그랬다. 면접 전형까지 올라갔던 대학 이름, 첫사랑과 비슷한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아팠다. 남이 내가 원했던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꿈꾸던 삶을 살면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지금의 내 삶도 내가 선택한 삶이었다. 이 모두 한때는 최선이었던, 가장 좋아 보였던 삶이다. 그러니 내 삶을 사랑해야 했다. 내가 내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사랑해주지 않을 것임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하지메 또한 어떤 삶을 살고 누구와 이어졌든 삶의 모습이 크게 달랐을 것 같지 않다. 사는 곳이나 직업, 재산 같은 건 달랐을지 몰라도 끊임없이 다른 삶을 갈구하고 놓친 가능성을 헤아렸을 것이다. 다행인 건 그러는 동안에도 하지메가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았고, 결국은 그렇게 살아온 일상이, 그가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을 날려버릴 뻔한 위기에도 그를 구했으며 그의 곁에 남았다는 것이다. 결국 하루하루를 잘 살고 그렇게 이루어진 내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숙한 삶의 태도가 아닐까. 불륜으로 시작해 성숙이며 인생을 논하게 만드니 역시 하루키는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