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생활 좌파들 - 세상을 변화시키는 낯선 질문들
목수정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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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는 작가 목수정이 21세기 파리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열다섯 명의 '생활 좌파'를 만나 인터뷰한 기록이다. 저자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민주노동당의 당직자였다가 파리로 돌아갔다. 4년 동안 한국 정치 지형상 극좌에 속하는 정당에서 일하면서 저자는 한없이 격렬하고 그만큼 빨리 식는 좌파들을 목격했다. 파리의 좌파들은 달랐다. 이들은 극좌부터 중도까지 이념적 스펙트럼이 다양하고, 단기간의 급격한 혁명보다는 장기간 지속할 수 있는 운동을 추구하며, 여성, 노동, 인권, 문화, 예술 등 다채로운 분야에서 좌파의 목소리를 냈다. 저자는 이들에게서 일시 정지 상태의 꿈을 다시 시작할 단서를 찾는다.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든 이유는 개개인이 자신을 변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존재의 감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 힘든 것이다. (p.73) 


저자가 만난 파리의 생활 좌파들 중에는 예술가도 있고 연구원도 있고 공무원도 있고 초등학교 수위도 있다. 도시를 떠나 대장장이가 되길 택한 사람도 있고 정부 부처나 학계의 중심에서 좌파 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관심 분야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은 모두 좌파다. 이들에게 좌파란 우리나라에서 흔히 빨갱이라 불리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정치적 입장이 아니다. 이들에게 좌파란 주어진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익숙한 것보다 낯선 것을 지향하며, 어떤 순간에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불가능해 보이는 영역까지 사유와 활동의 경계를 넓히는 자세다.


 파리의 생활 좌파들은 바로 그러한 자세로 프랑스 사회 곳곳에 딴죽을 건다. 68혁명 당시 낙태 합법화를 주도한 페미니스트는 이제 여성 노인 문제를 제기하고, 루브르 박물관 무료화 운동을 하던 저널리스트는 프랑스 박물관들에 엄청난 기부금을 내고 세계적인 사진작가의 명성을 얻은 '아해'라는 인물이 유병언(세월호 사건의 그 유병언 맞다)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이전까지의 삶에 브레이크를 건 사람도 있다. 정부기관 연구원은 자신의 지식이 부당한 목적에 쓰이는 것을 반대해 대장장이가 되고, 대기업에서 고액 연봉을 받던 이는 난민에게 무료로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된다. 정당에 가입하고 집회에 나가는 것도 좋지만 생활 속에서 좌파의 생각을 실천하는 것도 좋다. 좌파란 더 아래로, 더 왼쪽으로 향하는 태도이지, 소수의 정치인, 운동가들만이 향유하는 이념이 아니다. 


한때는 일상적 실천보다 모순이 쌓이고 쌓여 폭발하는, 이른바 혁명의 방식으로만 세상을 개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둘 다 필요하다. 피에르 라비가 말한 콜리브리 정신, 즉 개개인이 자신의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p.73) 


저자는 파리의 생활 좌파들로부터 생태 농업의 선구자 피에르 라비의 '콜리브리 정신'을 발견한다. 콜리브리는 우리말로 벌새라는 뜻이다. 옛날 어느 숲에 불이 나자 동물들은 달아나거나 멀리서 바라만 보았다. 그때 작은 벌새 한 마리가 나타나 나뭇잎에 물을 떠 불을 끄려 했다. 신이 벌새를 보고 "그래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타이르자, 벌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답했다. 저자는 벌새처럼 생활 속에서 자기만의 혁명을 실천하는 콜리브리 정신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비록 당장은 힘이 작고 세상을 바꾸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아도 그런 힘이 하나둘 모이고 수천, 수백 배로 커지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자본주의가 세상을 움직이는 종교가 되면서 자본의 논리는 지구촌 사람들을 빠른 속도로 제압해갔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뭔가 다른 것을 희망하기를 점점 잊어가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에릭은 자신이 원하는 일은 하고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으며 살아감으로써 간단히 세상의 종교인 자본을 제압한다. (p.39) 


저자는 거리예술가 에릭을 보면서 '자신이 원하는 일은 하고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으며 살아감으로써 간단히 세상의 종교인 자본을 제압'하는 삶을 예찬한다. 원하는 일 하기는 몰라도 원하지 않는 일 하지 않기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연예인 가십 듣거나 보기 하지 않기, 하릴없이 TV 홈쇼핑이나 대형 마트 구경하지 않기, 1+1이나 증정 같은 미끼 상품에 낚이지 않기. 이런 작은 일들도 생활 속에서 자본을 조금이나마 제압할 수 있는 실천이 아닐까. 이제까지 난 좌파가 아니라고, 현실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고개 돌리기 일쑤였지만, 이제부터는 나만의 진보, 나만의 정치적 실천을 찾아 해봐야겠다. 그러다 보면 내 삶에도 무언가 혁명 같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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