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 우리 시대 여성을 만든 에멀린 팽크허스트 자서전
에멀린 팽크허스트 지음, 김진아.권승혁 옮김 / 현실문화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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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거나 사회적 금기에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몹시 끌렸다. 고려의 신하이면서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세운 이성계나,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쉽고 편한 친일 대신 고단할뿐더러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반일을 택한 안중근, 유관순 같은 이들의 삶이 궁금했다. 여고, 여대에 다니면서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 저항한 글로리아 스타이넘, 시몬 드 보부아르 같은 이들의 삶에 눈을 떴다. 허나 어디까지나 호기심 어린 시선이었을 뿐, 감히 동경하거나 흠모하지는 못 했다. 그런 말을 하자면 책임이 따를 텐데 스스로 그러한 삶을 살아낼 용기도 자신도 없었다. 


그런 나의 흐리멍덩한 정신을 번쩍 깨우는 책을 만났다.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끈 시민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이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1858년 맨체스터의 급진주의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로는 드물게 노예제에 반대하고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아 어릴 때부터 정치와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아무리 자유롭고 진보적인 집안에서 자랐어도, 여성을 남성의 하인이나 노예, 집안의 사유재산쯤으로 여기는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기란 어려운 일. 왜 팽크허스트는 직접 여성 참정권 운동에 뛰어들었을까. 그녀는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자기 집 안에서도 남녀의 차별은 존재했다고 말한다. 어릴 적 아버지가 그녀를 보고 "얘가 남자애로 태어나지 않았어"라고 말한 일은 그녀 마음에 오랫동안 상처로 남았다. 


결혼 후 빈민구제위원회에 들어가서 겪은 일들은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빈민 문제를 비롯해 아동 문제, 교육 문제, 노동 문제 등은 남성들이 간과하거나 신경 쓰지 않으며 여성들이 더 잘 해결할 수 있다고 느꼈다. 가령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안에서 살림해야 한다는 인식 때문에 여자는 젊어서 노동 기회를 얻지 못하고 늙어서는 연금을 받지 못해 빈곤에 시달리는 문제, 출산과 양육의 책임을 여성에게만 떠맡기고 남성에게는 묻지도 않는 문제 등은 남성들이 관심조차 두지 않고 해결할 의지도 없기에 여성이 참정권을 얻어 여성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다.


남성들의 전투는 몇 세기 동안 세계를 피로 물들였다. 남성들은 이러한 공포와 파괴 행위에 대해 기념비와 위대한 노래와 서사시라는 보상을 받았다. 올바른 대의를 위해서 싸운 여성들은 자신들의 목숨 말고는 누구의 목숨도 해치지 않았다. 이 여성들이 어떤 보상을 받게 될지는 시간만이 알려줄 것이다. (pp.15-6)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지적하는 영국의 사회 문제가 21세기 한국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달갑지 않다. 오히려 한국은 여성차별을 넘어 여성을 혐오하는 양상마저 나타나는 꼴이라니.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똑똑하고 적극적인 여성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의 권리를 보호하고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기 몸 하나만 지키는 게 아니라 딸린 가족들과 가까운 이웃들을 돌보고,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보탬이 되는 게 뭘지 생각한다. 마치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남자들이 기록하는 역사(history)에선 찾아볼 수 없는 '진정한' 위인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벅차기도 무겁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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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honne 2016-07-01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치님은 이 책도 읽으셨군요!! 네이버 블로그서 뵙다고 여기서도 뵈니, 왠지 더욱 반가운 그런 느낌입니다.^^ 저도 잘 읽어볼께요!!

키치 2016-07-01 14:09   좋아요 0 | URL
thehonne님 반갑습니다!! 저 네이버 블로그에도, 알라딘 서재에도 상주하고 있어요. 자주 보아요 ㅎㅎ 이 책은 북펀드 참여한 걸 계기로 읽었는데 참 좋았어요 ^^ 덧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