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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죽는 게 뭐라고>가 책 두께며 내용이 기대보다 얄팍해 아쉬웠다면 이 책은 그 아쉬움을 날리기에 충분하다. 1938년생인 사노 요코가 사십 대 중반이던 1985년에 나온 이 책은 (일본에서) 출간된 지 30년이 지났음에도 글에서 쉰내가 나지 않는다. 외려 2016년 한국에서 읽을 수 있는 여느 글보다 신선하고 상큼하다. <사는 게 뭐라고>를 읽으며 킥킥댔던 시간을 다시 체험할 수 있다.
이 책에는 그야말로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 못생겨서 놀림당하는 개한테 감정이입한 이야기, 유학 시절 이탈리아에서 와인을 들입다 마시고 뻗은 이야기, 멋진 남자 배우를 두고 혼자 망상 한 이야기 정도는 얌전한 편이다. 어머니가 숨겨둔 야한 잡지를 훔쳐봤던 이야기,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저속한' 러브 스토리로 오해한 이야기, 심지어는 BL의 전설 <바람과 나무의 시>를 주변 남자들에게 읽힌 이야기까지 가감 없이 나온다. <100만 번 산 고양이>처럼 아름답고 서정적인 이야기를 쓴 동화 작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스펙터클한 인생이다.
모르는 사람은, 그림책 작가는 프릴 달린 분홍색 옷을 입고, 투명하다시피 한 먹을 것을 드시며, 남의 험담 같은 건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다. (중략) 실상의 나는 흔하디흔한, 지나치리만치 산문적인 인간이며, 이 세상의 괴로운 일들을 충분히 맛보면서 그 현실을 기꺼이 살아온 사람일 뿐이다. (p.357)
사노 요코는 동화 작가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깨주기도 하지만, 동화가 만들어내는 환상이 참혹하고 구슬픈 현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벌어 먹일 능력도 없으면서 자식만 줄줄이 낳은 부모에 대한 기억, 다정했던 오빠가 종전 후 일본에 오자마자 죽어버린 기억, 오빠 없이 혼자서 산을 넘어 통학하는 길이 무서워 걸으면서 책을 읽었던 기억, 이혼 후 혼자서 아들을 키우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에 매달렸던 기억들이 그녀의 동화를 만들었다. 어쩌면 그런 기억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일주일이 멀다 하고 온갖 새로운 그림책이 쏟아지는 지금까지도 <100만 번 산 고양이>를 포함한 그녀의 동화들이 읽히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게 아닐까.
독서는 그처럼 나에게 지성도 교양도 가져다 주지 않지만 때때로 감동하거나 감탄하거나, 아름다운 마음씨가 되거나, 분노에 떨거나 하는 것을 몹시 싼값으로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만큼은 좋다. 나는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채로, 눈만 두리번두리번거리면서 마음속에서 꺄아 꺄아 기뻐하고 싶은 거다. (p.320)
배가 부를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이 책의 말미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독서는 게으른 자가 즐기는 값싼 취미에 불과하다는 자조 섞인 충고가 나온다. 연애 소설을 읽을 시간에 살아있는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책에 그려진 세상을 대강 훑어볼 시간에 직접 육안으로 보고 느껴라. '스펙터클'한 삶을 산 사노 요코의 충고인만큼 마음에 와 닿는다. 오늘처럼 햇살이 좋은 날에 사무실에 처박혀 점심시간을 이용해 밀린 리뷰를 쓰고 있으니 더더욱. 착각일까. '책 그만 읽고 밖으로 나가!'라고 호통치는 사노 요코 여사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은 건. '열심히 하'는 건 그만두고, 이제 정말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