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결정 -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 일상인문학 5
페터 비에리 지음, 문항심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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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엔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 악몽도 악몽이지만, 악몽을 꾼 탓으로 새벽에 잠이 깨 좀처럼 다시 잠들지 못해 고역이었다. 아직 주위가 컴컴한 시각. 홀로 방에 누워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자니 머릿속에 온갖 걱정이 떠올랐다. 끝내 이대로 죽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침대에서 기어 나와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일주일에 하나씩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로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나도 무언가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삶을 바꿀 수 있을까. 겨우 한 챕터를 다 읽으니 잊었던 졸음이 몰려왔다. 책은 언제나 최고의 수면제다.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이대로 죽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삶을 영위하던 남자가 돌연 포르투갈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오르는 이야기를 그린다.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쓴 독일 철학자 페터 비에리는 2011년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열린 강연을 기록한 <자기 결정>이란 책을 내기도 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기 결정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자기 인식은 왜 중요한가?', '문화적 정체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라는 다소 무거운 질문에 대해 간결하고 명료하게 답한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이 행복하고 존엄해지기 위해서는 '자기 결정의 삶'을 살아야 한다. 자기 결정의 삶이란 타인의 시선, 사회적 규범, 외부의 강제, 자기 검열 등에 구속받지 않되, 불가피하게 구속될 경우에는 그 구속 또한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삶이다. 문제는 자기 결정의 전제인 '자기'를 제대로 인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자기를 가장 잘 아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지만, 하루에도 수십 가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나는 정직하다'고 믿는 것처럼, 자기를 미화하고 때로는 비하하는 자기 기만이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정한 자기를 인식할 수 있을까? 저자는 기만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진정한 자기를 만나는 방법으로 '언어'를 든다. 언어를 통해 자기 인식을 하는 방법으로는 문학적 글쓰기와 외국어 학습이 있다. 문학적 글쓰기를 하면 자기의 진짜 자아상을 확인하고 자기 가능성의 스펙트럼을 확장할 수 있다. 외국어를 배우면 모국어를 낯설게 느낄 수 있고 생각 없이 쓰던 말들을 가려 쓸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머릿속에서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상태로 떠도는 생각을 언어화하고 언어화된 생각을 눈으로 확인하면,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세분화할 수 있고 자기 인식을 보다 정확하게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돈이 되든 안 되든 작가가 되든 못 되든 꾸준히 글을 쓰고, 글을 못 쓰면 책을 읽고, 계속적으로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다. 

사고의 또 다른 카테고리와 삶의 다른 멜로디를 새롭게 배우는 것은 사람의 교양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에서의 결정적인 깨달음을 선사해줍니다. 모국어의 습득을 통해 내 것이 되었던 언어적 정체성과 사고의 정체성은 이제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내 모국어는 그저 시대적, 지리적으로 우연히 내가 쓰는 언어가 된 것뿐이며 다른 것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문화적 정체성이란 우연한 것이며 항상 대체물이 있습니다. 교양은 바로 이러한 우연성을 인정하는 것이고요. 교양은 자만심과 독단론, 외부의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낙인과 평가절하로부터 우리를 방어합니다. (pp.78-9)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 언어를 가지면 다양한 방면의 교양을 쌓고 문화적 정체성을 갖추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이때 교양은 자기가 남보다 똑똑하고 우월하다는 인식을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까지 자기를 구속한 것들이 우연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또 다른 가능성이 있음을 알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우연성을 인식하고 또 다른 가능성이 있음을 자각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결정으로 이어진다. 결정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일, 그래서 타인이나 조직, 사회가 결정하는 대로 따랐던 일을 거부하고 온전히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진정한 자기 결정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인식하고 언어를 갈고닦고 교양을 쌓는 것이 결국에는 자기 결정의 삶을 살기 위해서인데,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자기 인식은 찾아볼 수도 없고 언어며 공부며 돈이 되고 출세에 도움 되는 것만 따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언젠가 신문에서 프랑스 사람들은 외국어를 하나 정도는 할 수 있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고,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고, 근사하게 대접할 수 있는 요리가 있고, '공분'에 의연히 참여하고,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해야 중산층으로 인정받는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재산이나 지위가 아닌 외국어 능력과 취미, 사회 참여 정도로 중산층을 가르는 인식 자체도 멋지지만, 오로지 부동산, 연봉, 자동차, 저축액만으로 평가하는 우리나라의 중산층 기준과 확연히 대조되어 더욱 멋있어 보였다. 

 생각해 보니 지난 새벽 악몽을 꾸고 깨어났을 때 쉬이 다시 잠들지 못할 만큼 날 괴롭혔던 생각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 남들보다 잘 살까 하는 '찌질한' 고민이었다. 언제쯤이면 온전히 나 스스로 나의 행복을 결정하고 성공을 판단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아직 요원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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