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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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이라는 소설이 나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게 누가 쓴 어떤 작품인지 모른 채 그저 그런 영미 소설 중 한 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앵무새 죽이기>의 작가 하퍼 리가 55년만에 공개한 후속작이고, 심지어는 <앵무새 죽이기>에서 흑인 인권을 옹호하는 연설로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 변호사 애티커스가 180도 달라진 면모를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왜 이제서야 후속작이 세상에 선보였을까? <앵무새 죽이기>를 읽고 받은 감동은 거짓이었을까? 애티커스는 대체 왜,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읽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배경은 <앵무새 죽이기>와 마찬가지로 1950년대의 미국 남부 앨라배마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똘똘하고 깜찍한 소녀였던 스카웃은 어느새 20대 숙녀가 되어 진 루이즈라는 원래 이름으로 불린다. 뉴욕에서 지내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진 루이즈는 대도시 뉴욕과 달리 따분하리 만큼 한가로운 마을 풍경이며 예전과 비교해 달라진 게 없는 사람들의 모습에 편안함과 답답함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진 루이즈는 우연히 아버지 애티커스의 비밀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 범인으로 몰린 흑인 청년을 변호하여 진 루이즈의 마음 속에 정의의 수호자로 자리잡은 아버지가 실은 오랫동안 흑인 차별을 옹호해왔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여기서 진 루이즈가 속상한 마음을 뒤로 하고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딸로 살길 택했다면 이 소설은 많은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나 역시 <파수꾼>을 읽기 전 출판사의 홍보 문구며 먼저 읽은 사람들의 실망했다는 평을 읽고 이런 감상을 기대했다. 그러나 작가는 오랫동안 정신적 지주였고 인생의 등불로 삼았던 아버지의 추악한 진실을 보고 그동안은 몸만 큰 소녀였던 진 루이즈가 진정한 어른이 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파수꾼>으로 이어지는 시리즈의 주인공은 애티커스가 아니라 스카웃, 즉 진 루이즈다.



진 루이즈는 실제로 독립했지만, 뒤에서 받쳐 주고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적 힘이 되어 준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이를 의심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전혀 없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아빠라면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입장을 굽히지 않고 완강히 버틸 때 그럴 수도 있는 것은 아버지 때문임을 깨닫지 못했다. 품위 있는 인격과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게 한 그 모든 것은 아버지가 심어 놓은 것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자기가 아버지를 숭배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p.168)



진 루이즈에게 애티커스는 아버지 그 이상의 존재였다. 어머니를 잃고 뒤이어 오빠까지 죽는 일을 겪고 남은 유일한 가족인 데다가(숙모와 삼촌이 있긴 하다), 딸에게 자상하고 사회에서도 명망 높은 아버지를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흑인 청년을 변호하는 모습을 목격한 사건은 진 루이즈가 아버지를 숭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진 루이즈는 그런 아버지를 따라 정의롭고 자기 할 말은 하는 어른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추악한 면을 보고 거침없이 비난한 다음 등을 돌렸다면, 영원히 화해하지 않거나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복수했다면, 독자들은 속이 시원했을지 몰라도 그것이 작가의 진짜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진 루이즈는 아버지라는 우상을 파괴하는 동시에 애티커스를 인간으로 받아들였고, 애티커스와 이념적으로 화해할 수는 없어도 그와 대립하는 형태의 공존을 택했다. 누구에게나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것, 그리하여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선과 악을 모두 포용하는 것이다. 진 루이즈는 어린 시절 어떤 사건으로 인해 성(性)은 무조건 나쁘고 더러운 것이라는 오해를 풀고 좋은 면도 있다는 것을 알게된 바 있다. 이를 통해 육체적으로 성장한 것처럼, 이번엔 선의 상징이었던 아버지의 이면에 악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추한 면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깨달음으로써 정신적인 성장을 완결지었다. 선과 악이 공존한다느니 악을 포용한다느니 하는 생각이 선악의 이분법에 익숙해있던 독자에겐 낯설고 미적지근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현실이자 진실이 아닐까.



<파수꾼>은 <앵무새 죽이기>만큼 감동적이지 않다. 5,60년 전에 쓰인 작품이라서 그런지 문장도 딱딱하고 작가의 초기작이어서인지 군더더기도 많다. 소설 자체의 완성도는 아쉽지만 <앵무새 죽이기>와 연결해서 읽으니 생각할 점이 많다. 그동안 <앵무새 죽이기>의 한쪽 면만 봤던 건 아닌가 싶다. 진 루이즈가 덮고 있던 껍질을 깨고 처음으로 두 발로 서는 이야기를 통해 <앵무새 죽이기> 내지는 애티커스라는 '영웅'에 대한 껍질을 깨고, 나아가 내가 믿는 정의와 선이 과연 옳은지, 내가 따르는 영웅이 그럴 만한 자인지 되짚어보는 것이야말로 이 소설의 진정한 독법은 아닌지. 하퍼 리가 살아온 시대가 워낙 흉흉하여 정의며 선이며 영웅에 대해 의심하는 것조차 위험했던 것, 이로 인해 작가가 더 집필할 용기를 내지 못해 그의 생각을 더 많이 엿볼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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