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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영화는 말아먹고, 아내와는 이혼하고, 돈도 없고 일도 없으니 이대로 콱 죽을까 고민하던 영화감독 인모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발신인은 일흔의 노모. "닭죽 쑤어놨는데 먹으러 올래?" 평소같으면 바쁘다는 핑계를 댔겠지만, 밥 사먹을 돈도, 밥 해먹을 집도, 밥해줄 여자도 없는 처지인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집으로 달려가 닭죽 두 그릇을 신나게 비운 그는 그 길로 스물네 평짜리 작은 아파트에 눌러 앉는데, 얼마 안 있어 어머니와 인모, 쉰 살 넘은 형 이렇게 세 식구로도 좁은 스물네 평짜리 집에 마흔이 넘은 여동생과 그녀의 딸까지 들어온다. 이 가족의 평균 연령은 무려 47세. 나잇값 못하고 일흔 넘은 어머니 집에 눌러사는 이들의 이야기가 바로 천명관의 소설 <고령화 가족>이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순식간에 읽었다.
막장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 어디서 반전될지 모르는 기발한 줄거리와 스피디한 전개, 현실감 넘치는 인물 묘사와 저자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닌가 싶을 만큼 리얼한 에피소드가 읽는 내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많은 독자들이 천명관을 왜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꼽는지 알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대단한 것은 디테일이다. 사실 가족이라는 소재는 식상하다면 식상하고, 나이가 들어서까지 부모 신세를 지는 자식들이라는 설정도 웬만한 독자라면 상상할 만한 얘깃거리다. 하지만 전혀 식상하거나 지겹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인모와 흡사한 삶을 산(것으로 알려진) 저자의 경험이 녹아 있어서가 아닐까. 내가 알기로 저자는 등단하기 전 오랜 시간을 영화계에서 보냈다. 등단한 건 마흔 살이 되던 해인 2003년. 그 때까지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았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계에 발은 담그고 있지만 인정은 못 받고 나이만 들어가는 자신을 가엾게도 여기고 한심하게도 여기는 인모의 모습에서 저자의 과거를 본 듯한 느낌을 받은 건 우연만은 아니리라.
형 한모와 여동생 미연의 캐릭터는 다소 디테일이 떨어진다.
전과 5범의 건달과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는 술집 여사장이라니.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본 듯한 설정이다. 조카 민경도 문제아 여중생이라는 이미지에 갇혀 구체적인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여기에 세 남매의 출생의 비밀, 한 여자를 두고 두 형제가 라이벌이 되는 상황, 자신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서로가 서로를 챙겨준다는 결말 또한 다소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러웠다. 좋게 말해 영화화 될 정도의 재미는 있지만, 나쁘게 말해 그만큼 소설로서의 재미는 떨어진달까. 그래도 아직 저자의 최고 역작으로 일컬어지는 <고래>를 읽기 전이니 평가는 미뤄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