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은 잠들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초능력자란 말 들어본 적 있어요? 사이킥(psychic)이라고도 하죠."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는 고사카 쇼코는 고향집에 들렀다 도쿄로 돌아가던 중 태풍을 미처 피하지 못한 고교생 이나무라 신지를 차에 태운다. 폭우속을 달리던 두 사람은 우연히 도로 중간의 맨홀 뚜껑이 열려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겨우 밖으로 나간 고사카의 시야에 어린이용 노란 우산이 들어오고, 혹시 이 안으로 아이가 빠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은 현실이 된다. 고사카는 기자의 본능으로 취재를 시작하지만, 이내 자기보다 이나무라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을 눈치 챈다. 혹시 범인이냐고 묻는 고사카에게 이나무라가 털어놓은 충격적인 진실은 자기는 범인이 아니라 초능력자라는 것. 남의 마음이나 기억을 읽을 수 있다는 그의 말을 고사카는 믿지 않지만, 그 때부터 주변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일본을 대표하는 추리소설가 미야베 미유키의 1991년작 <용은 잠들다>.
<용은 잠들다>를 읽으며 나는 자연히 저자의 대표작 <모방범>의 후속편인 <낙원>을 떠올렸다. <낙원>에는 <용은 잠들다>의 신지, 나오야처럼 초능력을 지닌 소년 히토시가 나온다. 이들은 모두 같은 능력을 가진 친척(주로 할머니)이 이 능력 때문에 비극적인 운명을 살다 간 전례가 있고, 그래서 능력을 숨기고 살며, 결국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다는 점 등이 비슷하다. 화자인 고사카 또한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라 관찰자이며 언론계에 종사하고, 자식을 가지기 어렵다는 점 등이 <모방범>과 <낙원>의 화자인 르포라이터 마에하타 시게코를 연상시켰다.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여자만을 노리는 범죄가 등장한다는 점, 화려한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는 두 명의 남자가 비극적인 범죄를 저지른다는 점은 <모방범>과 유사하다. 작가는 이 때 이미 훗날 대표작이 될 <모방범>과 <낙원>의 얼개를 구상한 것일까? 새삼 두 작품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정말로 자기 자신 안에 용을 한 마리 키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요.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을 갖춘, 신비한 모습의 용을 말이죠. 그 용은 잠들어 있거나, 깨어 있거나, 함부로 움직이고 있거나, 병들어 있거나 하죠." 나는 잠자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코마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용을 믿고, 기도하는 것 정도가 아닐까요? 부디 나를 지켜주세요,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기를, 내게 무서운 재앙이 닥치지 않게 되기를, 하면서요." (p.388)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에 나오는 초능력은 용서(?)가 된다. 
두뇌 게임을 통해 범인의 트릭을 해결하는 정통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팬으로서는 사실 초능력이라는 소재가 마뜩하지 않다. 초능력으로 범인을 찾을 수 있다면 굳이 형사며 탐정이 고생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에 나오는 초능력은 용서(?)가 된다.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영능력이나 이상 현상을 믿는 전통이 깊고, 실제로 그런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미미여사가 초능력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작가들과 달리 진지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만 보아도 저자는 초능력을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만 지닌 신비한 능력이나 괴이한 현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용'을 깨운 것에 불과한 정도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또한 무한한 힘을 얻을 수 있는 행운도 아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고 자기 인생을 스스로 콘트롤할 수 없는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초능력자인 소설 속 두 소년이 번민하고 갈등하는 이유도 결국 그것이다.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용. 그것은 미야베 미유키의 삶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고교 졸업 후 속기사로 일하다가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저자는 고단샤가 개최한 일반인 대상 소설 교실에서 처음 소설 창작을 배워 27세의 나이에 작가로 데뷔했다. 그 때 그녀는 훗날 자신을 일본 문학의 거장으로 만들어줄 용이 막 깨어나기 시작했다는 걸 알았을까? 사회파 추리소설을 시작으로 미스터리, 시대극까지 아우르는 작가적 역량이 국문과나 문예창작과는커녕 대학 문턱에도 발을 들인 적도 없는 여인에게서 태동했다는 사실은 정신을 바짝 들게 만든다. 과연 내 안에는 어떤 용이 잠들어 있을까.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이야기 외적으로도 생각해볼 만한 것이 많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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