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은 그녀가 알코올에 잠긴 밤의 여로를 위풍당당 끝까지 걸어간 기록이자 주역은커녕 길가의 돌멩이로 만족해야 했던 나의 쓰디쓴 기록이기도 하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소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제목처럼 교토의 이곳저곳을 순례하는 아가씨와 그녀를 짝사랑하는 대학 클럽 선배의 춘하추동 일 년 간을 그린 이야기이다.



배경은 현대 도쿄로 지극히 현실적이건만 묘하게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이 소설을,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터뷰집 <책으로 가는 문>에서 동화에 가깝다​고 평한 바 있다. 낭창낭창한 그녀가 봄날 밤거리에서 이백이라는 술꾼과 대작을 벌이지를 않나, 주인공은 그녀가 어릴 적에 읽은 동화책을 구하기 위해 이백이 개최한 불냄비 먹기 대회에 참가하고, 캠퍼스에서는 '축지법 고타츠'니 게릴라 연극 '괴팍왕'이니 하는 기상천외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진다.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처럼.



그렇다고 이 소설이 마냥 판타지적인 것만은 아니다. 둔하지만 사랑스러운 그녀와 그녀만을 짝사랑하는 순정파 선배의 풋풋한 모습​하며 흥겨운 밤거리 문화, 헌책시장의 푸근한 정경, 젊음이 후끈거리는 대학 캠퍼스, 눈덮인 대학촌의 모습은 이곳 서울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일상적인 공간을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환상의 무대로 활용하다니. 과연 모리미 도미히코를 '매직 리얼리즘' 작가로 부를 만 하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주인공 선배가 일 년 간의 끈질긴 노력 끝에 '주역은커녕 길가의 돌멩이로 만족해야 했던' 신세에서 겨우 벗어나는 결말. 목표는 그녀라는 성을 함락하는 것인데 시종일관 바깥 해자만 판다고 괴로워했던 주인공의 모습이 영화 필름처럼 뇌리를 스쳐가면서 괜히 울컥해지기까지 했다. 엉뚱함과 구질구질함, 여기에 삽질(!)과 달달한 결말까지 더해진 이 소설. 청춘의 춘하추동을 여실히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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