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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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언젠가는 저도 불쌍한 사람들(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임 - 옮긴이)에 관한 이야기를 쓸 거예요." 소년 모모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줄줄 외지만 점점 눈이 멀어가는 하밀 할아버지 앞에 이렇게 다짐한다. 모모의 주변엔 정말 불쌍한 사람들뿐이다. 하밀 할아버지를 비롯해 한때는 창녀였으며 지금은 창녀들이 맡긴 아이들을 돌보는 로자 아줌마, 몸은 남자지만 마음은 여자인 롤라 아줌마, 작은 집에 일가친척들이 모여 사는 가난한 이웃들까지 하나같이 그렇다. 그 중 가장 불쌍한 건 모모다. 모모는 자신에게 엄마와 아빠가 없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이제는 하나뿐인 가족인 로자 아줌마까지 잃을 처지다. 대체 모모의 '앞의 생'은 어떻게 될까?



프랑스의 소설가 로맹 가리가 너무 유명한 본명 대신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쓴 소설 <자기 앞의 생>은 이렇게 가엾은 소년 모모의 이야기다. 워낙 유명해서 한 번은 읽어보려고 진작에 샀다가 얼마전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 소개되었길래 드디어 읽었다. 아쉽게도 나와 아주 잘 맞지는 않았지만 왜 사람들이 이 소설을 명작이라고 하는지는 알겠다. 창녀들이 맡긴 아이들을 돌보는 로자 아줌마 집에 얹혀 사는 모모가 불우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사는 모습이 귀엽고, 짐짓 어른스러운 척 하면서도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나 자신과 다른 처지인 아이들을 볼 때 느끼는 질투심 같은 감정을​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이 꼭 아이같아 순수했다. 그리고 그런 모모를 주변 어른들이 따뜻한 시선으로 함께 돌보는 정경은 지금은 보기 힘든 옛 공동체의 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



무엇보다도 유태인이니 아랍인이니, 기독교니 유대교니 이슬람교니 하는 인종적, 종교적 구분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풍자한 점이 좋았다. 이는 낳아놓고도 돌보지 않은 아들을 찾아 십여 년만에 나타난 아랍인 남자가 제 아들이 유태인 교육을 받고 자랐다고 하니 "나는 아랍인 아들을 원합니다! 유태인 아들은 필요 없어요!"​​라고 울부짖으며 돌아선 장면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남자와, 저 자신은 유태인이면서 아랍인인 모모를 아들처럼 사랑하고 돌본 로자 아줌마 둘 중에서 과연 누구를 '진짜' 부모라고 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을 비롯해,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는 인종과 국적, 종교 등을 이유로 많은 이들이 싸우고 다치고 죽어가고 있다. 좌니 우니, 진보니 보수니 하며 필요없는 땀과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모모와 그 이웃들보다도 더 '불쌍한 사람들'인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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