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 1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15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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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을 안 좋아하는 부모님과 달리 나는 어릴 때부터 사극을 즐겨봤다. 문제는 텔레비전 리모콘은 늘상 부모님의 차지라서 내가 보고싶은 방송을 볼 수도 없었거니와 잠깐이라도 볼라치면 들어가서 공부하거나 자라는 말을 듣는 통해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말 재방송으로 보고 싶은 드라마를 보곤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미망>이었다. 1997년에 방송되었다고 하니 그 때 내 나이 열 살. 초등학교 4학년에게는 다소 어려운 내용이었을 텐데도, 드라마의 배경이 북한땅이라 가볼 수 없는 개성인 데다가 주인공 태임이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온 집안을 호령하는 개성 상인으로 나오는 점이 신선해 재미있게 보았던 것 같다. 송상이니 삼포니 하는 낯선 말도 어린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 같고. 그래도 나이가 어려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도 많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본 건 아니라서 늘 전체 줄거리가 궁금했는데, 언젠가 드라마 원작이 박완서 선생의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읽어보리라 마음 먹고 실행에 옮긴 것이 오늘에 이르렀으니. 나도 참 게으르다.

 

 

이야기는 19세기 중반 개성에서 시작된다. 중인 출신의 거상 전처만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지혜롭고 믿음직한 장남이 가업을 이어주길 바랬으나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아들이 남긴 자손은 대를 이을 수 없는 손녀 태임이 전부였다. 그래도 전처만은 똘똘한 손녀 태임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고, 태임 또한 할아버지의 뜻을 알고 비록 자신은 여자이지만 이 집안을 지키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독수공방하던 어머니의 죽음과 뒤이은 전처만의 죽음, 가문의 쇠락과 국권 침탈 등을 겪으며 태임은 여성인 자신의 처지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남편인 종상과 동생 태남, 딸 여란과 아들 경우 등 태임의 식구들도 저마다 세월의 풍랑에 휩쓸려 뜻하지 않은 인생을 살게 된다. 조선의 멸망과 일제의 국권 침탈, 식민 통치, 해방 후의 혼란 등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국면을 그린 역사 소설이기도 하지만, 주인공 전태임의 일생을 그린 여성 소설, 그녀를 중심으로 한때는 번창했던 송상 가문이 쇠락하고 멸망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가족사 소설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시대적 배경과 줄거리 면에서 박경리의 <토지>와 유사하다는 평이 많다. <토지>를 다 읽지 않아 모르겠지만, <토지>가 남도에서 출발하는 한반도 이남을 무대로 하는 이야기라면 <미망>은 이북의 이야기라는 점이 다르다. 작가인 박완서가 개성 출신인 만큼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을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역시나 자전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되는 이야기가 많았고, 개성에 대한 세밀한 묘사나 인물들의 대화에 개성 사투리가 등장하는 점은 다른 소설에서 볼 수 없는 신선한 점이였다. 또한 작가는 개성 사람들이 개성이 과거 고려의 수도였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으며 왕조가 바뀐 뒤에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대신 상업에 종사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이런 점은 이북 출신작가만이 가질 수 있는 관심이요, 할 수 있는 설명이 아닌가 싶다. 수도 하면 서울, 아니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나 부여 정도를 떠올리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이나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 같은 곳은 생각도 못한 게 이상할 정도다. 가볼 수 없다는 것은 더더욱 아쉽고.

 

 

소설과 드라마의 내용은 비슷한 듯 다른 부분도 있는 모양이다. 소설에서는 태임의 어머니가 친정 머슴과 단 한 번 우발적으로 정사를 가진 것으로 나오는 반면 드라마에서는 자신을 속이고 학대한 시집 식구들에 대한 복수로 일부러 외갓 남자들을 만나고 다닌 것으로 그려진다고 한다. 또한 드라마에서는 태임의 남편 종상이 집안 사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태임의 딸 여란은 일본 유학길에 만난 상철과 결혼해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고 관동대지진 때 안타깝게 목숨을 잃는 것으로 나온다고 한다. 드라마의 설정이 확실히 극적이기는 하나 인물들의 다양한 캐릭터와 가치관을 보여주는 데에는 부족했을 것 같다. 종상은 원래 은행을 세우려다가 좌절되어 사업을 하게 된 것이 뜻밖에 시대의 조류를 잘 타 성공하게 되고 이것이 이야기의 한 축이 되는데 안 나온다니 아쉽고, 여란 또한 똑똑한 신여성에서 유학생의 첩으로, 친일파나 다름 없는 남자의 아내로 몰락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이런 다양한 인물 유형이 나오지 못한 점은 드라마만 봐서는 알 수 없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대체로 재미있었으나 인물 구성이 태임의 가족을 비롯한 상류층, 기득권층 위주라서 일반 민중들의 삶을 보기 어려운 점, 특히 여성에 대한 묘사가 종래의 여성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점은 한계로 보인다. 주인공 태임만 해도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도 활발히 제시하고 사회 운동에도 관여하는 등 그 당시 여성으로서는 파격적일 정도로 적극적이고 진보적인 활동을 많이 했는데, 작가는 그런 태임의 사회 활동보다 연애와 결혼, 출산과 양육 등 여성으로서의 삶에 더 주목한 점이 독자로서 아쉬웠다. 여란과 혜정 등 다른 여성 캐릭터들 또한 소위 말하는 '깨인' 여성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만나고부터 삶이 멈춰버리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물론 당시 여성의 삶이 실제로 그러했기 때문이겠지만. 어쩌면 무려 수십여 년도 더 된 옛날 여성의 삶이 21세기인 지금의 여성의 삶과 그 모습은 다를지언정 굴레는 그다지 다르지 않은 데에서 오는 안타까움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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