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실수는 사랑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한 운명과 혼동한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클로이가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였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우리의 사랑 이야기의 발단을 운명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은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증명해준다 - 내가 클로이를 사랑했다는 것. 우리가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결국 우연일 뿐이라고, 989.727분의 1의 확률일 뿐이라고 느끼게 되는 순간은 동시에 그녀와 함께하는 삶의 절대적 필연성을 느끼지 않게 되는 순간, 즉 그녀에 대한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p.18)
예전 남자친구가 어느 도넛 체인점의 어느 도넛을 특히 좋아했다든가, 그가 그 해에 가장 좋아했던 유행가는 무엇이었다든가, 수많은 걸그룹 중에 특히 어느 그룹을, 그 중에 어느 멤버를 좋아했다든지 하는 것은 귀신같이 기억하면서도 정작 그에게 형이 있었는지 누나가 있었는지, 그가 안경을 썼는지 안썼는지, 머리색이 검은색이었는지 흑갈색이었는지 하는 것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때가 있다. 심하게는 그의 이름과 얼굴조차 가물가물할 때도 있는데, 그 때마다 나는 여자란 사랑을 할 때마다 그 사랑이 첫사랑인 것처럼 빠져들기 때문에 지난 사랑을 잊어버리는 동물이라고 변명 비슷한 위로를 스스로에게 하지만, 때로는 한때는 그토록 아끼고 좋아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이 시간과 함께 사그라드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주인공 남성이 비행기 옆 좌석에 앉은 것을 인연으로 교제하게 된 여성 클로이와 연애하는 과정을 통해 사랑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소설 형식의 에세이다. 이 책은 알랭 드 보통의 다른 책 <우리는 사랑일까>와 상당히 유사한데, <우리는 사랑일까>의 화자가 여성인 반면 이 책의 화자는 남성이라는 점이 다르다. 나는 <우리는 사랑일까>를 더 재미있게 읽었는데, 화자가 나와 같은 여성이라는 점이 강력하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은 소설이라는 틀을 가지면서 동시에 사랑이라는 주제를 알랭 드 보통 특유의 학문적 관점으로 분석하고 탐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테면 두 사람이 만날 확률을 수학적으로 계산한다든가, 두 사람의 데이트를 프랑스 소설 <위험한 관계>에 빗댄다든가, 연인인 클로이의 얼굴이 객관적으로 보기에 그다지 아름답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진 남자는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유에 대해 철학과 심리학적 관점을 빌려 설명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이렇게 '보통'의 소재를 '보통 아닌' 관점과 필치로 풀이하는 방식은 저자의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적어도 연애만큼은 이런 학문적 영역에서 분석되고 연구될 일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책을 읽는 내내 깊이 공감한 것을 보면 '보통'의 분석이 '보통'은 아닌 듯.
무엇보다도 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내 운명의 상대이거나 반쪽이라서가 아니라, 사랑에 한껏 몸이 달아있을 때 하필이면 그 사람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마음에 와닿았다. 이 나이 먹도록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보고 겪어보니 한때는 그토록 뜨거웠던 사랑이라는 감정이 한 시절의 불같은 자극 내지는 충동 같은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는 오랜 기간 볼 것 못 볼 것 다 보며 서로 문드러지는 과정을 거치며, 사랑인지 아닌지 모를 인연을 사랑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내가 이제는 짧은 연애보다는 긴 결혼이 절실한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