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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
야기사와 사토시 지음, 서혜영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생각지도 않은 일이 나 자신 속에 숨어 있었던 문을 여는 경우도 있다. 그 때의 내 기분이 정말 그랬다. 그렇게, 그것이 계기가 돼 나는 자꾸자꾸 책을 읽어 치우게 됐다. 지금까지 내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독서 욕구가 팡! 하고 소리를 내며 튀어나온 것 같았다. 나는 맛난 음식을 음미하듯이 천천히 한 권 한 권 읽어나갔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고 아무리 읽어도 책이 떨어질 걱정도 없었다. 나가이 가후, 다니자키 준이치로, 다자이 오사무, 사토 하루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우노 코지......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읽은 적 없는 작가, 이름조차 몰랐던 작가. 어쨌든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전부 손에 들고 탐욕스럽게 읽어나갔다.
책을 통해 이런 멋진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왠지 지금까지의 인생을 손해 본 것 같은 기분조차 들었다. 나는 더 이상 게으르게 자고 또 자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잠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대신 외삼촌과 가게를 번갈아 보면서 내 방에서든 카페에서든 책을 읽었다. 헌책 속에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많은 역사가 쌓여 있었다. 그것은 결코 책의 내용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한 권 한 권마다 오랜 세월을 거쳐 온 흔적을 나는 여럿 발견했다. (pp.56-7)
모리사키 서점은 헌책방이 가득한 고서점가 한쪽 모퉁이에 오도카니 서 있다. 작고 오래됐고 겉보기에 도저히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가게. 손님도 그리 많이 오지 않는다. 취급하는 책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흥미가 없는 사람은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래도 이 서점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며, 서점 주인인 사토루 외삼촌은 늘 싱글벙글 웃으며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모리사키 서점과 그 주인이 나는 좋다. (p.208)
언제부터였을까. 현실이 고달플 때마다 일본소설 속으로 도망을 친 건. 생각해보면 늘 그랬다. 중학교 시절, 고입 연합고사를 앞두고 들른 동네 헌책방에서 나는 운명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와 요시모토 바나나를 알게 되었다(비록 그 해부터 평준화로 바뀌는 바람에 잘나온 연합고사 성적은 쓸모없게 되었지만). 고등학교 때는 학교 옆 도서관에서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는 게 얼마 안 되는 낙이었다. 대학교 때 다시 에쿠니 가오리를 만났고, 사회에 나오고 나 자신과 세상에 실망할 때마다 오가와 이토, 미우라 시온 등 비교적 최근 유명세를 얻은 작가들의 작품을 알아갔다. 왜 하필 일본소설이었을까.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호기심? 일본어를 아는 데에서 오는 여유? 그보다는 일본소설 특유의 말랑말랑하고 가벼운 분위기가 삶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적절하기 때문인 것 같다. 소설이라는 게 꼭 노벨문학상 같은 거창한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 쓰일 필요가 없다는 걸, 지루한 오후에 마시는 카페라떼 같은 소설도 충분히 소중하다는 걸 일본소설이 내게 가르쳐 주었다.
야기사와 사토시의 소설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도 현실을 잊기 위해 집어든 책이다. 주인공 다카코는 남자친구와 직장을 한꺼번에 잃고 폐인처럼 지내다가 같은 도쿄 하늘 아래인 진보초에서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외삼촌 사토시의 전화를 받는다. 딱히 하는 일도 없고 수입도 없으면 헌책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달라는 외삼촌의 부탁에 못이기는 척 다카코는 짐을 꾸린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동안은 잠만 자며 시간을 축냈지만, 남아도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헌책방 거리에 사는 이웃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지내는 곳이 헌책방이다보니 그녀는 책도 많이 읽게 되었는데, 일단 한번 읽기 시작하자 헌책의 매력에 무서울 정도로 빠져들었다. 나는 헌 책보다 새 책을 좋아해서 헌책방에 자주 가는 편은 아닌데, 헌책의 매력을 설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언제 한번 시간 내서 헌책방 산책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되면 중고서점에라도......
이 책은 두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야기가 연결되기 때문에 한 편의 장편소설 같은 느낌도 든다. 전체적으로는 도쿄에 실제로 존재하는 헌책방 거리인 진보초가 무대인 책에 관한 소설이지만, 더 크게 보면 주인공 다카코의 성숙과 외삼촌 사토루의 사랑을 그린 따스한 드라마다. 몇 년 전 도쿄에 여행을 갔을 때 진보초에 간 적이 있는데 너무 짧은 시간을 보내서인지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이 별로 없다. 이 책을 읽은 지금 그곳에 간다면 모든 풍경이 소설 속 장면들처럼 느껴질텐데...... 아, 가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