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과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보통이다. 순위는 350명 중 175등. 농담처럼 딱 평균이다. 지탄다처럼 호기심을 갖고 상위권에 드는 것도, 사토시처럼 적극적 무관심으로 하위권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이바라처럼 실수하는 게 싫어 그것을 극복하려는 생각도 없다. 시험공부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은 것도, 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한 것도 아니다. 나는 가끔 특이하다는 말을 듣는데,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증거다. 나는 위쪽의 맑은 물도, 바닥에 가라앉은 앙금도 아니다. 상승도, 하강도 지향해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사토시의 말이 맞았다. '회색으로 살고 있는 건 호타로 너뿐인 것 같은데'. 학력만 그런 게 아니다. 특별 활동, 스포츠, 취미, 연애...... 요는 인간성의 문제이리라.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도 있다. 국어사전에도 이제 곧 등재될 텐데, 고교 생활 하면 장밋빛이다. 그리고 장미는 필 장소를 얻어야 비로소 장밋빛이 될 수 있다. 나는 적합한 토양이 아니다. 그뿐이다. (pp.100-1)

 


만화를 그다지 즐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만화가인 동생 덕에 전혀 무관한 삶을 살고 있지도 않다. 심심할 때는 동생 작업실에 있는 만화를 보기도 하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만화 행사에 동생의 도우미 역할로 나가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 내가 최근 깊게 빠져버린 애니메이션이 있다. 제목은 <빙과>. 동생 어깨 너머로 보다가 그림이 예뻐서 각잡기 보기 시작했는데, 너무 재밌어서 원작 소설까지 읽고 있다. 소설 <빙과>는 애니메이션으로 치면 초반부에 나오는 이야기. 소설과 애니메이션 줄거리에 큰 차이는 없지만 작중 화자인 주인공 호타로의 내면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많고, 애니메이션에서 미처 표현하지 못했거나 보면서 놓친 부분을 찾을 수 있어서 읽어볼 만하다.

 


주인공 오레키 호타로는 고1이라는 청춘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좀처럼 즐기지 못하는 녀석이다. 그의 신조는 "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한다. 해야 하는 일은 간략하게". 이른바 '에너지 절약주의자'다. 에너지 절약주의자답게 에너지가 드는 일 - 연애, 운동, 취미 등등 - 은 사절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발신인은 외국 여행을 떠난 하나뿐인 누나 도모에. 부원이 없어 폐지 위기에 놓인 동아리 '고전부'에 들어가 동아리를 존속시켜달라는 - 부탁을 가장한 명령에 호타로는 할 수 없이 고전부에 가입하고, 그곳에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못 참는 동급생 소녀 지탄다를 만난다. 여기에 호타로의 오랜 친구인 사토시와 마야카가 가입하게 되고, 이렇게 만난 고전부원 네 사람이 학교 안팎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해결해나가는 것이 큰 줄거리이다.



줄거리만 봐서는 흔하디 흔한 청춘물 같지만 코난 도일, 아가사 크리스티 등의 유명 미스터리 작품을 이용해 사건을 해결하기 때문에 미스터리물, 탐정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읽기에도 무방하다. 또한 고전부원 네 사람이 성장해가는 모습과 호타로와 지탄다, 사토시와 마야카 사이의 러브라인, 친구이면서도 라이벌이기도 한(주로 사토시 관점에서) 호타로와 사토시의 미묘한 관계를 보는 것도 흥미진진하다. 



또한 소설 <빙과>의 마지막에는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에피소드가 아닐까 싶은, 지탄다의 삼촌에 얽힌 에피소드가 나온다. 에피소드의 내용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호타로의 에너지 절약주의가 단순한 귀차니즘이 아니라 자기 인식과 세계관의 문제라는 점, 그리고 소설에 나오는 주요 에피소드 대부분이 다수의 타자와 소수인 자기 자신의 주관을 어떻게 조율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단순한 이야기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이런 건 (아무래도 애니메이션의 주 시청층인) 청소년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무엇보다도 나는 고전부원 네 사람이 탐정 소설을 이용해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해결해나가는 방식이 오로지 텍스트에 의존해서 과거의 사실을 밝히는 '비블리오 미스터리'라는 장르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놀랐다. 비블리오라면 내가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인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의 그 비블리아인 것 같은데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에서도 고서당 주인인 주인공 시오리코가 문학 작품을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 미스터리의 열렬한 팬이 아님에도 이런 작품들만은 좋아하는 걸 보면 비블리오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나한테 꼭 맞는가 보다.



이 작품의 유일한 아쉬운 점은 시리즈물임에도 불구하고 발행되는 속도가 느리다는 것(첫 편인 <빙과>만해도 2001년 작품이다). 그동안 원서를 읽으라는 계시인가... (엘릭시르 판은 예쁜데, 일본 원서는 디자인이 안 예뻐서 읽고 싶은 마음이 안 든다만...) 아무튼 올 여름은 <빙과>로 기억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