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코스키의 독서편력 - 책벌레들의 우상
릭 게코스키, 한기찬 / 뮤진트리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교육의 첫 단계는 문학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한 작가를 뜨겁게 찬미하는 일이다. 지적 사춘기를 회고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자신에게 문학의 향유 능력을 밝혀 준 어떤 작가와의 우연하고도 예기치 못한 만남이 있었음을 고백할 것이다. - T.S.엘리엇 (p.83)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고 해도 과연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가 있는 걸까? 아마 소설을 읽을 때를 제외하면 그럴 것이다. 허구에 그토록 탐닉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의 내면세계를 파아하고 그것과 관계할 수 있는, 따라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하게 신뢰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처한 삶의 형식과,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사이의 관계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내 아내보다도 레오폴드 블룸(조이스의 <율리시스> 주인공-옮긴이)을 더 잘 아는데, 그것은 비록 제한적인 것이긴 해도 만족스럽다. 그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고, 책 속에는 그가 품은 동기와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것은 만족스럽기는 해도 충분치는 않다. 물론 그것이 사람들이 문학보다 삶을 선호하는 이유다. 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는 것보다 덜 자극적이고 덜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pp.174-5)

<스테잉 업>의 최종 원고를 읽으면서 나는 그것이 내 평생 가장 중요한 독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편안하고 유머가 넘치는 지혜로 가득 찬 그 원고는, 그동안 내가 한 번도 작가였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결국 나의 이상적인 독자는 나였던 셈이다. (p.387)  


릭 게코스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현존하는 서평가 또는 독서가 중의 최고로 꼽는다. 서평까지는 아니지만 독후감 정도는 꾸준히 쓰고 있는 블로거이자, 하루에 책을 한 장도 읽지 않고 잠드는 날이 드문 책벌레로서 그를 모른다는 게 어찌나 부끄럽던지. 서둘러 그의 책을 구입해 읽어보았다. 역시나, 책 날개에 적힌 그의 프로필 첫 문장부터 위엄이 넘쳤다. '세계 최고의 북맨(bookman). 말 그대로 문인이자 학자 겸 서적상, 독서인이다.' 책 또한 일반적인 서평집 형식이 아니라 마치 저자 자신의 자서전 같아 색달랐다. 이 같은 '독서회고록' 형식의 서평집도 게코스키가 거의 처음 시도한 장르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이제껏 서평집을 여러권 읽어보았지만 비슷한 글은 보았어도 책 전체가 이런 것은 처음이었다. 괜히 최고의 서평가로 손꼽히는 게 아닌가 보다.


게코스키의 삶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미국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책을 무척이나 좋아했고 가정과 학교 양쪽에서 양질의 독서 교육을 받았다. 자연스럽게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게 된 그는 겉보기엔 전도유망한 영문학 교수이자 학자이자 작가로서 창창한 삶을 사는 듯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는 아내와의 결혼 생활은 암초에 부딪치기 일쑤였고, 영문학 교수라는 직업에도 만족하지 못했으며, 영국에 사는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문제로도 갈등했다. 그 때마다 그를 유일하게 붙잡아주고 위로해주었던 것이 책이었다. 책이 있는 한 세상의 온갖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그가 세계 최고의 서평가, 독서가가 된 건 어쩌면 삶이 그만큼 지옥같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연애가 잘 풀리지 않을 때나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인간관계로 고생할 때일수록 더더욱 책을 찾게 되는 사람인지라 그의 모습을 보니 공감이 가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사람보다 책과 보낸 시간이 더 많다는 건, 그만큼 사람보다 책이 더 편하고 재미있었다는 반증일테니.


그런 그가 결국 책으로 구원받은 것은 나에게도 희망적이다. 마침내 그는 미래가 보장된 교수직을 버리고 서적상으로 변신해 얼치기 학자가 아닌 전문 독서가로서의 경력을 이어갔고, 아내와는 결국 이혼을 했지만 두 자녀와의 관계는 꾸준히 유지했으며, 새로운 사랑도 만났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해피엔딩이냐고? 모든 것이 해피엔딩일 수는 없고 나 역시 그걸 꼭 바라지도 않지만, 결국 그가 행복과 성공을 모두 거머쥐게 된 것이 단순히 책 한 권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억지 결말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에게 책은 단순히 현실을 잊기 위한 도피처 내지는 최음제 같은 것이 아니라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학교이자 명약이었던 것이 아닐까. 책으로 삶이 바뀌는 기적을 믿는 사람으로서 릭 게코스키가 체험한 기적 역시 믿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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