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수학 - 세상을 움직이는 비밀, 수와 기하
EBS 문명과 수학 제작팀 지음, 박형주 감수 / 민음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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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은 내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과목이었다. 과학만큼 싫지는 않았지만 결코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고, 공부를 할 때도 문제의 답을 맞추기에 급급했지 풀이하는 과정이나 원리를 알아가는 기쁨은 느껴본 적이 없다. 결정적으로 싫어하게 된 계기는 수능시험. 아무리 싫어도 평소 모의고사 1등급을 꾸준히 유지했는데 수능에서 2등급 후반의 점수가 나왔다(게다가 '물수능'이라고 불릴 만큼 난이도가 낮아서 타격이 컸다). 그 때부터 수학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고, 경제학을 복수전공으로 택하고도 경제수학, 경제통계 같은 과목은 피하거나 재수강을 하지 않을 만큼만 공부했다.



EBS 5부작 다큐멘터리 <문명과 수학> 제작팀이 만든 책 <문명과 수학>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학창시절에 만났더라면 내 인생이 바뀌었을까?'. 고대 이집트 문명부터 그리스 문명, 인도, 아랍을 거쳐 유럽과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궤적을 따라 수학의 역사를 파헤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수학이 재미있다고 느꼈다. 그저 시험 과목의 하나로, 지긋지긋한 문제 풀이의 대상으로 여겼던 수학이, 인류 문명의 정수가 담긴 핵심이자 위대한 발명품이었을 줄이야. 대학에서 과학사 수업을 듣고 처음으로 과학에 흥미를 느꼈던 때와 똑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은 3500년 전 이집트 서기관이 썼던 파피루스 한 장을 근거로 이집트에서 수가 만들어진 과정을 추적하고, 그리스 피타고라스 학파를 중심으로 수학의 체계가 만들어지고, 인도에서 이른바 '신의 숫자'라 불리는 0이 발명되며, 아랍에서 수학이 급격히 발전하고, 유럽에서 미적분이 발명되고, 현재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라 불리는 난제가 해결되기까지의 과정을 흥미롭게 그려냈다. 


나는 특히 유클리드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스승이기도 했으며, 그가 쓴 <원론>이 미국 독립선언문과 스피노자의 <윤리학> 등에 영향을 끼치는 등 수학 이외의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이제까지 수학과 정치, 윤리학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위대한 수학자 중 한 사람인 유클리드가 이집트 왕의 스승이었으며, 민주주의의 출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독립선언문>, 그리고 <윤리학>의 기초가 되었을 줄이야......!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몰랐으리라.


수학은 숱한 천재들의 에너지를 극한까지 소모시킨 후라야 어떤 세계를 열어 보이는 걸까. 하지만 그곳은 그만큼 엄정한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세계일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창조 속으로 수렴되는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문명 뒤에는 언제나 수학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한 이 역사는 되풀이될 것이다. 아직도 수학에는 남겨진 문제들이 존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가 만들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p.163)


수학은 언제나 당대 최고 문명 국가에서 발전했고, 정치, 경제, 행정, 건축, 문화, 예술 등 다른 분야와 결합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냈다. 그런데 우리나라 수학의 현실은 어떤가. 입시 도구로 전락한 지 오래이고, 대학에서도 수학과는 큰 인기를 누리고 있지 못하다. 2014년 8월 서울에서 '세계수학자대회'라는 큰 행사가 열릴 예정이지만 그 때까지 현실이 바뀔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이 책의 모태가 된 방송 EBS 다큐멘터리 <문명과 수학>이 2012 한국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 2012 대한수학회 특별공로상,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등 10개가 넘는 상을 수상하며 호평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수학이 지금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한다. 적어도 이 방송을 본 시청자, 책을 읽은 독자라면 교과서와 문제집 너머의 '진짜 수학'의 모습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취미 삼아 수학 문제집을 푼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나도 한번 풀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면 문제를 못 맞혀 아쉬울 것도 없고, 점수가 안 나와 속상할 것도 없다. 게다가 이 간단한 수식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머리를 짜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 어려웠던 수학이 한결 쉬워보일 것 같다. 심지어는 따뜻하고 뭉클하게 느껴지기까지 하지 않을까? <문명과 수학>. 아무래도 이 책은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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